"사과파이를 구우며.."

평화뉴스
  • 입력 2007.10.1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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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진이(방송작가)
"감사할 것이 너무 많은 가을, 나는 한층 겸손해진다"


나는 아버지에 물려받은 것이 많다. 굵고 동그란 눈을 물려받았고, 제법 보기가 괜찮은 코를 그대로 빼닮았다. 평소에는 조용하다가도 한번씩 불끈 하는 성마른 성정도 물려받았고, 이것저것 만들기를 잘하는 손재주도 물려받은 것 같다. 육친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에, 좋고 싫음에 관계없이 모두가 다 소중한 것들이지만, 그래도 가장 기쁘게 생각하는 건 손재주다.

아버지는 별로 배운 것이 없었던 분인지라, 자식들에게 과묵한 분이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내의 기질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신의 부모에게서 살뜰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는 분이라 표현이 서툰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도 자식들을 위해서 연필을 깎아주거나 종이배나 종이비행기를 접어주는 일은 마다치 않았는데, 아마도 그것이 애정을 표현하는 당신만의 방법이 아니었나 싶다.

연필깎기 기계도 더 가지런하게 연필을 깎아주시고, 학교에서 만들기 숙제가 있으면 직접 나서서 도와주기도 하셨다. 특별히 익힌 기술은 없었지만, 타고난 손재주 덕분에 밥은 곯지 않았다. 엿강정을 예쁘게 만들어서 팔았고, 누런 물엿을 사와서는 하얀 엿가락을 척척 만들었고, 깨엿, 땅콩엿도 직접 만들어서 내다팔았다. 그렇게 해서 자식 셋을 모두 공부시키고 한 가정을 일궜으니, 어찌 아버지의 손재주를 그냥 그런 것으로 여길 수 있을까? 그 귀한 손재주를 내가 이어받았다고 하니, 나는 복많은 사람임이 틀림없다.


"딸이 구운 게 더 맛있다 하신 아버지.."

손이 귀한 집안이라, 명절 때면 우리집은 늘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사 음식에 참여했다. 부침개를 구워내는 일은 내 담당이었는데, 그걸 처음 시작한 게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 생각하면 중학생이 뭘 하겠냐 싶지만, 나는 그때, 너무나도 대견하게도 제사에 쓸 부침개를 척척 구워냈다. 내가 부침개를 구울 때마다 아버지는 ‘허허, 그것 참..’ 하셨지만, 아버지는 내가 만든 부침개를 참 좋아하셨다. 그래서 제사 때가 아니어도 비가 내리는 날이나, 괜스레 출출한 일요일 오후 부침개를 직접 굽곤 했었는데, 그때마다 아버지와 가족들은 내가 만든 부침개를 맛있게 먹곤 했다. 심지어는 어머니가 구운 것보다 딸이 구운 게 더 맛있다고 해서 어머니를 섭섭하게 만들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음식하는 게 꽤나 즐겁다. 물론 어머니를 따라가지는 못한다. 어머니에게 요리는 즐거움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기에, 가끔씩 부엌에 들어가는 나와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건 못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저 가끔 기분이 나면 음식을 만들 뿐이니까. 그래도 뭔가를 만드는 게 즐겁기 때문에 부침개도 굽고, 빵도 만들어보고, 과자도 구워본다.


"내가 빵 굽기에 '필'이 꽂힌 이유"

얼마전 우리집에 작은 전기오븐이 들어왔다. 오븐 쓸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븐이 생기니 사정이 달라졌다. 빵도 구워보고, 과자도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요 몇주 동안은 휴일마다 빵 만든다고 온 부엌을 들쑤셔놓았다.

내가 참조하는 레시피는 전북 구례에 살고 있는 나의 지인이 직접 만든 것인데, 모두 유기농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것들이었다. 빵이나 과자를 구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우리가 흔히 먹는 과자와 빵에 얼마나 많은 흰색 밀가루와 설탕과 버터가 들어가는지 모른다. 이걸 다 알고나면 과자나 빵을 먹을 엄두가 나지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구례에 사는 나의 지인이 창조해낸 레시피에서는 우리 통밀을 쓰고 있고, 우리 땅에서 난 채소와 견과류, 달걀과 기름이 들어간다. 물론 버터와 초콜릿이 들어갈 때도 있지만, 그이의 레시피는 가능한 한 우리 몸에 맞는 건강한 빵과 과자를 만드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내가 빵과 과자 굽기에 ‘필’이 꽂힌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잘 몰랐던 우리 밀의 세계를 알게 되고, 이 땅에서 나는 농산물로도 맛있고 건강한 빵과 과자를 만들 수 있다는 데에 무한한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손재주를 주신 아버지, 좋은 레시피를 만든 친우, 그리고 이 땅에.."

지난 주말에는 처음으로 사과파이를 구워봤는데,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게 아니었다.
보통 파이에는 많은 양의 버터와 설탕이 들어가는데, 그이의 레시피에는 설탕과 버터도 전혀 들어가지 않는다. 그저 사과를 잘 졸여서 통밀로 만든 파이지에 담아서 예쁘게 잘 구우면 된다. 이렇게 해도 파이 맛이 날까 싶었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지난 추석과 몇 번의 제사를 거치면서 냉장고에 그득 쌓인 사과를 다 꺼내서 모두 냄비에 넣고 졸였다. 설탕은 한 스푼도 들어가지 않았다. 파이지를 만들 때도 버터 대신 포도씨유를 조금 넣어서 반죽했는데, 그것이 더 담백했다. 완성된 사과파이를 맛보니, 참으로 놀라웠다. 설탕이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속에 넣은 사과는 어찌 이렇게도 달콤하며, 바깥 과자 부분은 어찌 이리도 고소할 수 있단 말인가? 자연이 우리에게 준 적정량의 당도가 이런 것이 아닌가 하여 다시한번 감동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식구들은 완성된 사과파이의 모양을 보고는 감탄한다. 집에서 만들어도 제과점에서와 같은 모양의 파이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리고는 ‘네 손재주는 아버지를 닮은 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나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손재주와 늘 보고싶어하는 지인이 만든 레시피, 그리고 이땅에서 나는 먹거리들로 사과파이를 완성했다. 모두 마음 속으로 깊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대상이니, 이보다 더 큰 선물은 없을 것이다. 사과파이 한조각을 베물어 먹으면서 파이를 만들 수 있는 손재주를 주신 아버지를 떠올렸다. 좋은 레시피를 만든 나의 친우에게 감사하고, 이토록 달고 맛나는 먹거리를 준 이 땅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감사할 것이 너무 많아서 마음이 넉넉해지는 가을 한때, 사과파이를 먹을 때마다 나는 한층 더 겸손해지는 것 같다.

[주말 에세이 56]
이진이(대구MBC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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