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조기 영어교육, 과연 필요한가?”

평화뉴스
  • 입력 2004.05.0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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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경의 세상보기 ⑦ - <어린이 날>에 생각하는 ‘어린이 조기 영어교육’





둘째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된 후에는 생각지도 않게 많은 영어학원의 전화를 받는다. 학원의 선생들은 영어선행학습의 당위성을 열거하면서 내 위기의식을 부추킨다. 부모가 이 시기를 놓치면 아이들이 쫒아가질 못해 점점 더 어려워진단다. 또 우리 애는 너무너무 하고 싶어하더란다.
일단은 괜찮다고 넘어간다. 그러나 같은 학원에서 수차례 다른 선생들에게 전화를 받다보면 나중엔 내나름의 소신을 얘기하면서 전화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조기영어교육에 대해서는 확고한 내 나름대로의 소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의 큰 애는 독일에서 태어나 유치원 입학 전까지 독일에서 성장한 아이다. 한국아이들이 한국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나는 독일체류당시 집에서부터 교육을 철저히 시켜, 큰 애는 일찌감치 내 교육을 받으며 부족한대로 한국어를 익혔고 독일어는 탁아소, 어린이집, 독일인 보모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배워나갔다. 큰 아이의 독일어 실력은, 특히 발음은, 나이들어 배운 나보다 훨씬 나아서, 내가 제 선생들과 대화하는 걸 보면 오가면서 내 발음을 지적하곤 했다.

이렇게 독일서 성장한 큰 애는 내가 귀국하면서 같이 나왔다. 이 때 큰 아이는 7살이었고, 귀국후 1년간 난 서울에, 큰 애는 대구에 떨어져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은 큰 애의 독일어가 너무 아깝다면서 기회있는대로 내게 독일어로 대화하라고 했고 나 역시 대화중에 독일어 테이프와 책을 보여주면서 반복해서 연습했다.
그러나 아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끼리의 대구사투리를 잘 익혔고-독일에서는 서울말의 어른식 한국어를 내게 배운 셈이다- 그 배우는 속도에 비례해 빠른 속도로 독일어를 잊어버려가고 있었다. 한 6개월이 지나자 10문장 안팎의 대화정도 밖에 구사하질 못했고 1년이 지나면서 독일에서의 맛, 냄새, 풍경 등만을 어렴풋이 기억해내곤 했다. 독일에서 전화오면 그저 “어허~ 어허~”하면서 멋쩍게 내게 수화기를 넘겨주었다.

독일서 태어나 7살에 귀국한 아이...“1년도 안돼 독일어 능력 거의 잃어”

당시에 난, 내가 아이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빨리 독일어를 잊어버리게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딸과 비슷한 나이에 한국에 온 내 동료들의 아이들 역시 거의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다. 단지 독일에서 초등학교 저학년정도를 지내고 한국에 귀국한 아이들의 경우에는- 즉 이미 독일어알파벳을 익히고 온 아이들의 경우- 어느 정도 시간이 가도 떠나올 때의 독일어실력을 유지하곤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온통 한국사람과 한국어인만큼 독일어를 유지하는데 힘겨운 노력을 경주해야만 했다. 게다가 그 힘겨운 연습을 하면서 습득하는 독일어는 어린 시절에 접한 내용이니만큼 대화나 독해의 수준도 가벼운 생활용어 정도였다. 그 언어정도의 수준를 유지하려고 매일저녁 부모들과 한시간 정도씩 씨름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독일어와 함께 독일에 대한 향수도 키우고 있어 학교생활의 적응도 그렇게 수월해보이지 않았다.
우리 내외는 결국 아이의 학교적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또래 친구들과의 어울림에 더 큰 비중을 두었다. 자연스럽게 큰 아이는 그 아깝다던(?) 독일어를 완전히(!) 잊어버렸다.

다음도 비슷한 예이다. 우리가 독일에 있을 때 우리 큰 애와 똑같은 경험을 하고 한국서 성장한 대학생이 교환교수인 아버지를 따라서 독일에 왔었다. 우린 그 학생의 과거 독일어실력이 어떻게 부활(!)하는지 궁금했었다. 그런데 그 학생은 통상 우리가 독일에서 어학과정을 밟듯이 똑같이 1년의 과정을 밟은 뒤 대학입학 어학시험에 합격했다. 그리고 1년의 독일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다.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한다”

한 10여년간의 독일생활을 했던 나의 지론은 이렇다. 한국인이 외국어를 잘하는 것은 매우 필요한 일이다. 자신만만하게 누구든 만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국어를 잘 한다는 의미는 외국인처럼 발음을 잘 구사한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아무리 말을 잘해도 빈 말을 늘어놓거나 주제와 어긋나게 너절하게 얘기하는 것은 결코 잘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시 해야할 때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쓸데없이 과장되게 서구인의 몸짓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질문에 내 의견을 “내 생각대로” 왜곡되지 않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적재적소에 알아듣게 말을 하면 된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용이하지 않다. 여기서 발음의 문제는 그다지 크지 않다. 외국인이니까 어차피 우린 본토박이처럼 할 수 없다. 그 점은 인정하자. 그러나 대답을 잘 한다는 것은 타인의 말귀를 잘 알아듣고 내 의견을 조리있게 얘기할 수 있는 능력이다.
외국인의 말귀를 알아들으려면 그들 문화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며, 외국인들과 토론까지 하려면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알고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필자의 경험으로는 한국어로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잘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한다. 결국 한국어를 잘하는 사람이 외국어도 잘한다.

“외국어 구사기술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의 토대 위에 습득돼야”
...조기 영어교육 “지껄임만 반복하는 앵무새 무리를 양산하는 교육될까 걱정”


‘언어는 자신의 세계이다’ 라고 한 어느 유명한 철학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됨을 터득하는 과정에서 생활속에 스며든 국어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다. 한참 커가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진지하게 이해하고 소통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주변세계를 이해하고 추리하면서 생각하는 법도 배우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문화이며 이 속에서 아이들은 건강한 자기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나간다.
필자는 외국어 구사기술은 자신의 고유한 정체성의 토대위에서 습득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내용이 풍부해진다. 이런 것이 결여된 외국어교육은 어쩌면 독창적 인격성이 결여된, 멋없는 지껄임만을 반복하는 앵무새 무리만을 양산하는 교육이 될지도 모른다.

재밌고 신나는 유년시절을 보내야 할 아이들에게 이미 학교교육만도 벅차다. 거기에 효과도 아직 모르는 섣부른 외국어교육까지 해서 아이들을 주눅들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그러느니 저와 내가 조잘거리면서 엄마와의 재밌는 얘기추억을 만들어줄란다.


2004년 5월 5일 어린이 날에


김재경(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방송인. 사회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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