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삶'은 없다.

평화뉴스
  • 입력 2007.12.07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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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차정옥(동화작가)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먹자. 남의 인생 말고.."

책상 위 달력이 달랑 12월 한 장만을 남기기가 무섭게, 초등학교 여자동창들 모임 송년회에 끌려 나갔다. 달마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빠졌는데, 그 핑계들도 열한 가지는 떠오르더니만 열두 번째 핑계는 끝끝내 떠오르지 않아 눈 딱 감고 3시간만 버텨보자는 심정으로 시내 밥집으로 나갔다.

내가 기껏해야 초등학교 동창들 모임일 뿐인 일에 왜 이리 심각한 표현을 써 대느냐 하면 그 자리가 초등학교 시절의 숙제나 시험보다 백배는 끔찍하기 때문이다.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과, 71년생 돼지띠란 것, 여자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공통점이 없는 이들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세 시간이나 유지하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자리를 가도 얘기할 거리가 없어서 입 닫고 살아본 적이 없는 내가 이 모임에만 가면 정말 입 한 번 달싹거리지 못 하고 돌아온다.

그날도 결혼해서 아이 낳고 고만고만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30대 후반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까칠하고 잘난 척 하는 독신녀’라는 소리 안 듣고 무사히 이 시간을 마칠 수 있나 싶어 열심히 웃음 연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속으로는 일찍 일어날 궁리를 짜내면서... 나도 웃음연기 말고 대사 있는 연기도 하고 싶은데 아이들 얘기, 남편 얘기, 재테크 얘기, 드라마 얘기... 도대체 하나라도 내가 입을 뗄 수 있는 거리들이 없으니. 게다가 그날은 연말이라고 거하게 대낮부터 고깃집이었다. (육식을 못하는 까닭에, 그렇지만 입맛까지 까칠하단 소리 들을까봐 따로 시키지도 못하고) 세 시간을 상추와 당근만 씹으며, 그저 조신하게 웃고만 있으려니 참 할 짓이 아니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는지, 아니면 내 웃음연기가 완벽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헤어지기 전 마지막으로 내게 덕담이랍시고 한 마디씩 던져준다.
“넌 혼자 살아도 참 행복해 보여.”
“넌 남편 없어도 별로 외로워 보이지 않아서 좋다, 얘.”
“정옥인 독신이라도 성격 좋잖아. 애 없어도 생속인 것 별로 표 나지 않고.”

그 애길 들으면서 속없는 년처럼 허허실실 웃었다. 그러나 그 순간 입이 근질근질해서 미치는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억지로 웃느라 뭉친 안면근육을 풀면서 아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혼자서 중얼거렸다.
“난 혼자 살아서 행복하고, 남편 없어서 외롭지 않고, 아이가 없어서 성격이 좋다. 이것들아, 도대체 뭘 알고 지껄이는 건지...”

하루 종일 투덜투덜 대봐도 그래도 속이 풀리지 않는다. 대놓고 얘기하지, 왜 뒤늦게 이 짓이람. 그렇지만 낼모레면 마흔인 이 나이에 이십 대처럼 굴 순 없지 않나. 20대 후반에 ‘니는 아직도 결혼 안했나? 그 나이까지 뭐했노? 연애 안 하고.’ 하는 선배에게 ‘어, 아직도 이혼 안 하고 살고 있어요? 뭐했어요? 그 나이까지 바람도 안 피고?’ 했다가 성격 더럽다고 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욕먹는다. 나의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농담을 이해 못하는 인간들에게는 정말 더 이상 대꾸할 기력이 없다.

사람들이 ‘저 사람은 장애인인데도 참 즐거워 보여.’, ‘애가 아빠 없이 자랐어도 얼마나 반듯한지 몰라.’, ‘저 집은 가난해도 참 행복해 보여.’, ‘저 친구는 대학을 안 나왔어도 참 똑똑해.’ 따위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걸 보면 경악스럽다.

어느 누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할 순 없다.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돈이 없어도 행복할 수 있겠나? 결혼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혼자서 행복할 수 있겠나? 사지육신 멀쩡한 게 행복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어떻게 장애를 가져도 행복할 수 있겠나? 두 부모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이 어떻게 한 부모로도 행복할 수 있나?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은 ‘그렇기에’ 행복하다. 행복한 독신녀는 남편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고, 행복한 가난뱅이들은 바로 돈 따위 없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한 장애인은 바로 그 장애가 있기에 행복할 수 있는 것이고, 행복한 한부모가정은 아빠, 혹은 엄마 따위 없어서 행복할 수 있다.

자기의 잣대로 남의 인생을 재단하지 말자. 제발 자기의 잣대는 자기 인생에만 써 먹자.

[주말 에세이 60]
차정옥(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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