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자전거 인생, 그 삶의 쳇바퀴..

평화뉴스
  • 입력 2007.12.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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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화원시장 '자전거 병원장' 김태양(66)씨..
도시락도 못챙기던 가난..기름때 한 길로 5남매 보듬어..40년 원동력은 '즐거움'


화원시장 '자전거병원장'으로 불리는 김태양(66)씨...자신이 직접 쓴 간판으로 38년째 꾸려가고 있다.
화원시장 '자전거병원장'으로 불리는 김태양(66)씨...자신이 직접 쓴 간판으로 38년째 꾸려가고 있다.

"병들어 몸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자전거 빵구 때우는 일 계속 해야지"
오일장 시장통에서 40년 가까운 세월을 묵묵히 자전거 수리만 했다고 한다.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화원시장 '시장 자전거 병원'. 동네에서 '병원장'으로 통하는 김태양(66.남)씨.

김씨의 '시장 자전거 병원'은 화원시장 골목길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화원시장은 6일, 11일, 16일 이렇게 5일 주기로 장이 서고 있는 요즘 보기 힘든 오일장이다.
"무신날에도 10명 안팎의 손님들이 찾아서 소일거리를 줘 심심하지는 않지. 장이 서는 날이면 20명, 30명도 찾아"
무신날은 장이 서지 않는 평일의 경상도 사투리. 자전거 체인을 손보던 그는 찾는 손님이 몇이냐 되느냐는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봉급도 없었어...재미없었으면 대충 몇 년 하다 그만 뒀을게야"

김씨는 자신조차도 자전거 수리일을 평생하게 될지 몰랐다고 한다.
그의 어린 시절은 너무나 가난했다. 배움의 기회도 없었으며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였다.
"배운 게 있어야지. 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됐지 뭐야. 근데 재미있긴 해. 이 일 말이야. 재미없었으면 대충 몇 년 하다 그만 뒀을게야"...40년 가깝게 맡았을 '기름밥'이 지겹지 않았냐는 말에 김씨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김씨는 해방을 3년 앞둔 1942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관덕리에서 태어났다.
자전거가 큰 재산이던 시절, 가난으로 학업을 제대로 잇지 못한 그는 16살에 '국민학교'를 졸업했다고 한다.
졸업 후 김씨는 지역 자전거 수리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자전거와 첫 인연을 맺었다.

"봉급도 없었어. 다른 친구들은 도시락 싸가지고 와서 출퇴근했지만 난 가난해서 도시락을 챙길 수도 없었지"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주인집에서 숙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김씨.
그 대신 줄곧 기술만 배웠다고 했다. "숙식 제공의 대가로 돈도 못 받고 일만 했다"는 그는 "온갖 허드렛일과 잔심부름을 도맡았다"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힘든 시절이었지만 김씨는 그 때가 그립다고 했다.
"요즘도 가끔 자전거 고치러 오는 젊은 친구들 보면 그 때 생각도 나고...
내가 참 자전거를 좋아했나봐. 그랬으니 평생을 이렇게 자전거와 살고 있는 거겠지"

김씨는 그 곳에서 12년간 자전거 수리공으로 기술을 익혀 28살 되던 1969년 결혼과 함께 달성군 화원읍으로 정착, 지금의 자전거 병원의 문을 열었다.


"또 간판 사진 찍어? 우리 집 간판 유명해. 글씨도 내가 직접 쓴 거야"

자전거 점포 문을 열면서 직접 손으로 써 만들었다는 시장 자전거 병원이란 문구의 간판이 정겹고 이채롭다.
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지고 낡을 대로 낡은 허름한 간판. 겉보기엔 허름해 보여도 38년 동안 한 우물을 판 김씨의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듯 했다. 서투르면서도 오밀조밀한 간판은 그의 손재주를 가늠케 하기에 충분하다.

김씨는 "요즘은 보기 힘든 간판이라 그런지 가끔 사진기 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래 사는 내가 좋았으니깐 같이 사는게지"

김씨의 삶의 벗, 이순학(56.여)씨. 10살 연하의 부인이다.
매일 매일을 자전거 기름때와 씨름하고 살아온 김씨가 답답하지는 않았냐는 질문에 이씨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러자 김씨가 한마디 툭 던진다. "이래 사는 내가 좋았으니깐 이날까지 같이 살고 있는게지"

부부는 1남 4녀를 키웠다. 3명은 출가시키고 나머지 2명은 타지에서 직장생활 중이라 한다.
현재 화원에는 김씨 부부만 살고 있다.

"그래도 남편이 자랑스러워요. 평생을 자전거 고치면서 5남매 다 뒷바라지 했으니...고맙죠 뭐"
부인 이씨가 한참 후 쑥스러운 듯 나지막이 말했다.

예전보다 손님이 줄어 이들 부부가 버는 한달 수입은 100여만원 정도다.
김씨는 "예전에 애들 키울 땐 솔직히 힘들었는데 지금 버는 돈으로 우리 두 식구 먹고 살만은 하다"며 "건강할 때 까지 자전거 수리는 계속 할 것"이라고 말했다.

뻥튀기 과자를 꺼내는 김씨...'박상'은 김씨 부부의 또 하나의 삶이다. 이 기계도 40년이 넘었다고 한다.
뻥튀기 과자를 꺼내는 김씨...'박상'은 김씨 부부의 또 하나의 삶이다. 이 기계도 40년이 넘었다고 한다.


"나는 자전거 고치고 박상 담당은 우리 마누라야"
김씨의 자전거 병원 반은 뻥튀기 과자점으로 쓰고 있다.
'박상'은 뻥튀기의 경상도 사투리. 이 역시 요즘은 보기 힘든 시골 장날에서나 볼 수 있다.
"이 뻥튀기 기계도 40년이 넘었어. 설 같은 큰 명절이면 손님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다"고 말했다.
김씨를 찾은 날도 이들 부부는 뻥튀기 과자와 옥수수차 재료를 만들고 있었다.


"즐거움...내 손으로 간판 내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

자전거 수리일은 겨울이면 비수기다.
추운 날씨 탓에 아무래도 자전거를 타는 손님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나마 추울 땐 박상 손님들이 종종 찾아와 얼마 되지는 않지만 살림에 도움을 주고 있지"
박상 기계에서 옥수수차 재료의 김을 빼며 김씨가 말했다.

자전거 수리 점포를 열고 결혼을 하고 1남 4녀를 키우며 40년 가까운 시간을 달려 온 김태양씨.
좁은 작업장에서 그 많은 세월을 자전거와 함께 한 그의 삶을 지탱한 원동력은 뭘까. 쳇바퀴 도는 일상과도 같은 따분함과 권태가 밀려왔을 법도 한데 말이다. 김씨는 "즐거움"이란 짧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는 "아파 누울 때까지는 내 손으로 만든 시장 자전거 병원이란 간판을 내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속 터졌을 우리 할망구, 내년에는 더 잘해줘야지"

새해 소원을 물어봤다.
내년이면 김씨가 자전거 수리일을 한 지 39년이다. 김씨의 대답은 소박했다.
"40년, 50년이 지나도 계속해서 자전거를 고치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건강도 챙겨야 하고...내가 좀 무뚝뚝해서 우리 할망구 속 터졌을 때도 많았을 텐데, 내년에는 저 사람한테 더 잘해줘야지. 그게 소원이라면 소원이지. 허허" 김씨가 웃으며 대답했다.

옛 것에 대한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고 실증과 변덕이 익숙한 요즘, 40년 가까이 자전거와 함께 한 김씨의 삶은 '아름다운 외골수'를 새삼 느끼게 한다. 김씨처럼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새롭게 다가오는 2008년을 희망으로 준비하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을까. 돌아오는 길, 12월의 겨울하늘은 차갑게 느껴졌지만 아직도 진행형인 자전거에 대한 그의 '온기'는 그 차가움 마저 훈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글.사진 평화뉴스 남승렬 시민기자 pnnews@pn.or.kr / pdnam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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