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가슴에 남은 이야기.."

평화뉴스
  • 입력 2007.12.29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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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임(방송작가)
"반성문 한장, 이만하면 올 한해도 그다지 나쁘지 않다"


이실직고 하자면, 이 글은 주말에세이라기 보다는 한편의 반성문에 가깝다.
반성문. 이 세 글자를 길게 늘여 쓴 것.
그게 지금부터 내가 쓸 글이다.
하여,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라면,
이쯤에서 이 기사창은 닫아도 상관이 없겠다.

올 한해를 살면서,
누군가에게 아직도 정리하지 못한 ‘미안함’이 한구석이라도 없는 사람들은,
차라리 닫아주시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다. 흑흑.
(수많은 군중을 향해, ‘죄 없는 자가 저 여인을 돌로 쳐라!’ 하시던, 위로자 예수가 간절히 그립다. 생각해봐봐. 너도 털어보면, 누군가에게 말하지 못한 ‘미안함’이란 게 하나쯤은 있을 거야. 생각해봐봐. 있을 거야... 있을 거야... -그런다고 내 죄가 사해질까마는-)


나는 반성합니다.

평화뉴스에 주말에세이가 뜨지 않았던 몇몇 주말들-
뭐, 그게 전부, 몽땅, 다- 내 탓은 아니겠지만,
최근의 몇 번은 내 탓이었다.

그렇다! 사건의 전말은 아주 간단하다. ‘쓰겠다!’ 해놓고 ‘못’ 쓴 것이다.
“다음주 주말에세이...” 이렇게 시작하는 편집장님의 전화가 오면,
멀쩡하던 나는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갑자기 방송 ‘특집’이 잡히고, 별 마음 쓰지 않던 집안 행사가 덜컥 생각나고...(그렇다고 거짓말까지 하는 건 아니다. 그저 엄살을 좀 떤다. 흑흑- 이 변명의 가련함이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1차적으로는 ‘다음 달’ 정도로 미룬다.
그러다가 그 다음 달이 오면, ‘다음주’ 정도를 제시해보다가 결국 ‘알겠다’ 하고 마는 순간이 온다. (우리의 노련하신 편집장님께서는 ‘지난번 원고 쓴 게 어언 몇 개월...’ 로 시작하는 사실적 근거를 비롯해, ‘한 해 필진들 중에 실적이 가장 낮다’는 협박에서부터 ‘희소성 때문인지, 그래도 기다리는 독자들도 꽤 있다’ 등의 선심성 회유 발언까지 불사하신다. 이쯤 되면 더 개기다가는 정말 ‘에세이’가 아니라 ‘대작’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겨우 이거 쓰려고 그렇게 미뤘단 말이야?- 더 늦기 전에 ‘대작’보다는 차라리 ‘에세이’를 쓰기로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이 무거워진다. 무언가를 써야 해. 무언가를 써야 해...
그러다가, 기어이 마감이 코앞에 닥친다.
‘내일 저녁까지는 원고를 보내주셔야...’ 문자가 뜨면, 2차적으로 시간을 미루기 시작한다.
(이때부터는 서로 민망한 나머지 통화보다는 ‘문자’가 오고가게 마련이다)
‘저녁 9시’에서 시작해서, ‘오늘 밤 안으로’를 거쳐 ‘아침에 출근하시면 볼 수 있도록’을 지나 ‘오전 중’까지 갔다가, 끝내 묵묵부답- 펑크인 것이다.

그래, 나도 잘 안다. 참 징-하다.
처음부터 아예 ‘죽어도 안 된다’고 하면 기다리지나 않을 텐데, 이건 피차 못할 짓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서로 ‘낯이 안 서는’ 주말에세이 필진 노릇을 계속하는 이유는,
그게 평화뉴스기 때문이다.
내 게으름이나 무기력을 그나마 ‘신념’으로 바꾸어내기 때문이다.

시시콜콜 나누진 않았지만, 나는 오래오래 바라보고 있었다.
고만고만 그리 아쉽지 않은 방송국 기자직을 때려치고,
돈 안 되고 몸 피곤한 인터넷 신문을 시작하던-
모험을 시작하기엔 잃을 게 너무 많았던-
그다지 청춘이라고도 할 수 없던-
그러나 이대로는 살아갈 수 없었던-
한 평범한 사람의,
희망과 용기와 불안과... 때론 용기충천과 한계와 절망과 눈물과 그리고 소소한 기쁨을.

뭐, 위대하다거나 거창한 이야길 하자는 건 아니다.
그냥, 그 모든 과정을 저만치서 ‘구경’했던 나는,
사람들이 이 신문을 읽는 건,
편집장의 그런 삶의 ‘자세’를 읽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나도 어설프게나마 원고를 쓰려면 그런 ‘자세’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여, 나는 굳이 벌을 선다.
오늘 밤, 내일 아침, 오전 중... 그렇게 원고를 미루면서, 긴긴 시간 벌 서면서 반성한다.
참... 너 뭐 하고 살았냐? 너는 그렇게 네 삶에 대해 할 말도 없냐?
누군가를 만나고, 정신없이 바쁘다면서, 네 가슴에 남은 이야기가 이다지도 없냐-
누군가의 가슴을 두드릴만한 깨달음이 그토록 없었냐...
이 사회는커녕, 네 생활에 대한 ‘의견’ 하나 없이, 도대체 어떻게 사냐?...
넌 어째 아프지도 않은 것이냐-

괴롭긴 하지만, 편집장님 말마따나 1년에 한 세 번, 이렇게 벌 서는 시간도 없다면,
정말 안 될 것 같다.
나를 위해서라도 이 반성의 시간을 포기할 수 없는 나는-
아마도, 또 ‘쓰겠다’ 할 것이다. 그 이후의 일은....
(노력해보겠다- 정말 노력해도, 이 말밖엔 더 이상 할 수가 없다!!)

원고 쓰면서 벌 서는 게 내가 가진 신념이라니, 지나가는 개도 웃겠지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 신념은, 그렇기 때문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신념의 조건이란, 그런 게 아닐까.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는데도, 지켜나갈 수 있는 것.
가슴 속에, 누가 뭐래도, 나 혼자만이라도 지켜나가야 하는 가치 하나 없이,
어떻게 이 시간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왕 고백하는 김에 내가 가진,
차마 신념이라고 하기에는 민망한,
이상한 고집 몇 가질 소개하겠다.
이건 연말 부록이다.


부록 1.

매주 그 주치 방송원고를 써내면서, 일 주일 단위로 밥 벌어먹고 사는 나는,
집 안에서 컴퓨터 방에 있는 시간이 길다.
그런데 이사 온 해 첫 겨울, 나는 알게 됐다.
집 안에서 이 방이 제일 외풍이 심하고 추웠다.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몇 번이나 문풍지를 들었다, 놨다 했다.
찬바람이 부는 방 하나만큼은 그대로 둬야 하는 것 아닌가...
내 말들은 갈수록 가난해지는데,
몸은 자꾸만 편안해지려 하는 서른 셋의 나이.
생활 속에서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나는,
그저 이 추운 방을 견뎌보기로 했다.

사실 견디기보다, 외면하는 날이 더 많지만,
우리집의 추운방은 고유가시대에 살아남은 하나의 상징이 됐다.


부록 2.

“양 볼도 좀 빨갛게 하면 더 예쁠꺼야”라고 내가 말하면
정민은 “그건 화장으로 되는 문제가 아니고
네가 나를 좀 부끄럽게 만들면 되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김연수(문학동네.2007)

나이가 들면서 점차 얼굴이 두꺼워지고 있다.
열에 달뜨거나, 부끄러워서 양 볼이 빨갛게 변한 순간이, 언제였나.

화장으로 되지 않는 것.
그러나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것-
인간 ‘볼터치’ 같은 존재들을 여럿 곁에 두고 싶다.
그 효용성을 검증하기 위해,
나는 요즘도 맨얼굴로 다닌다.

추운 컴퓨터방에서 마감을 어겨 긴 시간 벌을 서다가,
얼굴에 열 내 가면서 쓰는 반성문 한 장!
이만하면, 올 한해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주말 에세이 62]
이은임(TBC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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