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 그도 나를 기억해줄까?

평화뉴스
  • 입력 2008.02.29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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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이은정
"눈이 마주치자 부끄러웠던,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것을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 때가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서울에서 전학 온 희석이는 여러모로 대구 촌놈 코찔찔이들과 달랐다. 드물게 장발인데다 옷은 늘 줄무늬 셔츠에 조끼를 받쳐입고 서울말을 쓰는, 세련된 귀공자 타입이랄까.

희석이를 처음 만난 건 내 친구 미정이 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희석이는 미정이 바로 옆집에 이사를 왔고 부모님들이 같은 직장에 다녀서 집안끼리 관계가 돈독했었나 보다. 내 친구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만화잡지를 구독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원 아파트에 사는 미정이 집에 뻔질나게 드나들었었다. “니는 우리 집에 만화책 보러 왔나” 하고 미정이가 짜증을 부려도 하루종일 미정이 집에 눌러 붙어 만화의 세계에 흠뻑 빠져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희석이가 미정이 집에 놀러와서 우리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함께 뛰어 놀았다. 미끄럼틀에서 잡기놀이를 하고 있을 때 미끄럼틀 꼭대기에 서 있는 희석이를 본 순간, 나는 녀석에게 반해버렸다. 하얀 앙고라털 조끼를 받쳐입고 까만 골덴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희석이는 눈부신 햇살을 받아 꼭 품격 높은 귀공자처럼 보였다. 그 뒤부터 내 눈은 희석이만 좇게 되었고 덕분에 미끄럼틀 꼭대기에서 바닥으로 그대로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희석이가 술래가 되면 나만 따라오는 것 같았다.

워낙 눈에 띄던 희석이는 학교에서도 유명한 아이였고 많은 여자애들이 희석이를 좋아했다. 내 친구 인순이는 희석이에게 쓰는 고백편지를 나에게 써달라고 보채서 눈물을 머금고 편지를 대필한 적도 있었다. 희석이가 당번이 되면 청소시간에 쓰레기통을 들고 긴 복도를 걸어가는 그 애를 보려고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여학생들의 꼴이란! 나는 애써 외면한 채 마룻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초칠만 해대었는데 희석이는 굳이 우리 반 교실 문턱을 밟고 서서 안을 기웃거렸다. 그럴 때마다 인순이는 희석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게 분명하다고 했다. 희석이네 반 가까운 쓰레기장을 두고 부러 먼 곳을 선택한 건 우리 반을 지나치기 위한 거라고. ‘그게 아냐!’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소리쳤지만 나는 그저 우울하게 마룻바닥만 닦을 뿐이었다.

눈이 펑펑 내리던 어느 겨울 날, 나는 일찌감치 학교에 쫓아가 책가방을 던져둔 채 친구들과 마구 눈싸움을 벌였다. 깔깔대며 눈밭에서 한참을 구른 뒤에야 문득, 희석이가 빙그레 웃고 서 있는 걸 알았다. 눈이 마주치자 우리는 서로 부끄러웠던 것 같다. 회색 코트를 입은 희석이가 천천히 실내화를 갈아신는 동안에도 나는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말도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바보같이.

그 겨울, 우리는 졸업을 했다. 그 해 겨울은 눈이 많이 왔다. 그렇지만 이젠 희석이를 볼 핑계거리가 전혀 없었다. 일기장엔 온통 희석이 얘기뿐이었다. ‘그립다.’ ‘보고싶다.’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 ‘사랑...’ 이라고 썼다가 연필로 빡빡 지워버렸다. 눈물을 들킬까봐 이불을 뒤집어썼다. 눈 오는 어느 날엔 희석이네 집 가까운 버스정류장에 몇 시간을 서 있었다. 시린 발끝을 부비대면서.

이듬 해 봄, 발랄한 중학생이 된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친구 집에 놀러 가고 있었다. 저 앞에서부터 누군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는데도 나는 ‘봄 햇살이 참 눈부시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그저 멀뚱히 마주 보았다. 한 쪽 어깨가 기울도록 무거운 책가방을 짊어 진 아이가 내 옆을 지나치며 씨익~ 웃는데도 바로 그가 내가 그토록 애틋하게 그려대던 희석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몇 발자국 걷고서야 아차! 하고 뒤돌아보았을 때, 희석이는 보이지 않았다. 오던 길을 마구 달려 가 보았지만 여전히 희석이는 없었다. 한참동안 가슴 졸이며 그 곳을 서성이다 나는 다시 돌아섰다. 그리고 그 아이를 잊었다.

벌써 26년 전의 일이지만 아이들 크는 걸 보면 문득문득 그 때가 생각난다. 아들 녀석에게 조끼 입히길 좋아하는 것은 첫사랑의 잔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수줍기만 했던 어린 날의 사랑. ‘그리움’이 무언지 ‘가슴 아픔’이 무언지 처음 알게 해 준 희석이... 어른이 된 그도 나를 기억해줄까?

[주말 에세이 69]
이은정(전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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