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카네이션"

평화뉴스
  • 입력 2008.05.09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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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류혜숙
"삶의 지층이 얇은, 전에는 깨닫지 못한 감성을 느끼다"

기억한다. 스무권이 넘는 책들은, 반은 주홍색, 반은 노랑색으로 된, 반들거리고 딱딱한 하드커버의 동화책이었다. 지금까지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나 도시의 이름들, 그런 우주적인 장소에서 아주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을 엮은 책이었다. 하나의 이야기가 한권 전체를 차지하기도 했고, 때론 시나 잠언만큼이나 짧기도 했지만, 물리적인 길이와 의미의 길이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종잇장 사이사이 가끔, 간략하게 그어진 곡선들의 크로키가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기도 했다. 올빼미가 된 것이 왕자인지 공주인지는 잊어버렸지만, 단 하나, 너무도 선명히 기억하는 이야기가 있다.

<엄마 없는 아이와 아이 없는 엄마가 하나 되어 함께 살았으면>

그것이 전부였다. 까맣게 칠하지 않았어도 어둠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얼굴도 표정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이를 느낄 수 있는, 그런 삽화가 곁들여져 있었다. 불행 덩어리인, 상처받기 쉬운 존재.

기억한다. 조금 더 자라나, 어디서 배운 건지 기억나진 않지만, 항상 흥얼거리곤 했다.

<나무야 나무야 서서 자는 나무야, 나무야 나무야 다리 아프지, 나무야 나무야 누워서 자거라>

저 기막힌 운율과 댓구 보다, 어디서 본 건지 기억하지도 못하는 그림이 실은 기억의 중추에 있다. 한 그루가 가장 앞에, 네그루가 그 뒤에, 무수한 숲이 배경이 되는 밤의 풍경. 그 속에 나무는 허리를 휘어 누워 자고 있다. 간략한 선으로 그어진 눈과 입이 웃고 있었다.

그때는 인생의 지층이 얇아, 그 하나하나의 켜만으로도 완결되는 단순한 심상이 있었다. 기쁨은 기쁨, 슬픔은 슬픔이었다. 이후 백 만 년쯤 흐른 것 같은 시간의 간극이 있고 모래알 같은 날들이 바람에, 태풍에 휩쓸리었다.

엄마 없는 아이가 되었고, 엄마가 되었을 만큼 나이를 먹었고, 기쁨도 슬픔도 단순하지 않으며, 파괴와 죽음 이외에 나무를 눕게 하는 방법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부재에 대한 총체적인 그리움이나 존재 자체만으로 그 시절을 행복이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의 사건, 하나의 슬픔을 조각조각 분석하여 결국 증오로 나아가는 잔혹성도 가지게 되었다. 삶의 지층은 부정합의 법칙을 따른다.

어버이날이다. 늦게 일어났다. 아빠는 2년 전에 사 드렸던 철제 카네이션을 내게 건네며 잠바에 달아달라고 하셨다. 그저께부터, 이게 있으니 꽃은 사지 말 것, 을 누누이 당부하셨던 터였고, 나는 꽃을 사지 않았다. 몇일 전부터 저금통을 털어 무엇을 살까 고민하던 아이는 이제 없다.

그러나, 차가운 금속성의 꽃을 옷깃에 달며, 그 손짓을 바라보는 아빠의 주름진 얼굴을 느낀다. 부모와 자식으로 이어져 온 나날들 속에 성장과 퇴보를 반복하며 만들어진 인간으로서, 때로는 서로 동정하며 위로받는, 얼굴과 목소리에서 전에는 깨닫지 못한 아주 미묘한 뉘앙스를 발견하는 인간의 감성을 느끼는 것이다.

[주말 에세이 72]
류혜숙(평화뉴스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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