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이 땅에 평화가 있었는가...”

평화뉴스
  • 입력 2004.05.24 0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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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의 시사칼럼 15>
“5월에 바치는 평화의 기도...이제 평화의 싹을 틔우자”




5월의 마지막 주다. 온 천지가 생명의 섭리로 가득한 5월도 이제 한 주일만 남았다. 올 5월도 여느 해처럼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을 차례차례 보냈다. 그러면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이를 한살 한살 더 먹어가면서 기념하는 날들의 의미가 새롭고 다가오는 것은 비단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지난 주에는 또 광주항쟁 기념일도 있었다. 벌써 24년의 세월이 흘렀다. 피비린내와 비명과 죽음으로 가득했던 광주가 24년이 지난 오늘, 평화와 인권의 광주로 다시 살아온 것이다. 이번 주에는 또 석가탄신일이 있다. 고통과 신음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자비와 평화를 가르쳐 준 석가모니의 탄신 기념일인 것이다.

그리고 올 5월에는 ‘부부의 날’도 있었다.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처음 맞는 ‘부부의 날’이었다. 둘이 하나가 되는 날이라고 해서 21일로 정했다고 한다. 그것 말고도 2004년 5월이 여느 해와 다른 것이 또 하나 있다. 죽었던 대통령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그러면서 위기에 처했던 민주주의도 다시 살아났다. 수십 년을 죽고 죽이는 싸움으로만 일관해 온 정치권도 상생과 타협을 말하기 시작했다. 국민을 배반하지 않는 정치인이 되겠다고 다짐도 했다. 매년 맞는 5월이지만 필자가 2004년 5월을 특히 뜻깊게 기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관통하는 정신을 하나 찾는다면 바로 ‘평화’가 아닐까 한다. 가정과 사회와 정치권에 평화의 정신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메시지인 것이다. 5월에 경험하는 자연의 신비도 그러하지만 법으로 정한 5월의 각종 기념일들의 의미도 바로 ‘평화’라고 생각한다. 5월 광주의 역사체험과 2004년 5월의 대통령 탄핵 기각결정이 준 교훈도 ‘평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며칠 뒤 5월 28일은 또 <평화뉴스>가 창간된 지 꼭 석 달 되는 날이기도 하다. 5월은 ‘가정의 달’일 뿐만 아니라, ‘평화의 달’이기도 한 것이다.

식민지, 전쟁, 폭력으로 얼룩진 현대사...“이 땅에 평화가 있었는가”

‘평화’. 그렇다. 우리 사회가 사람 살만한 세상이 되기 위해 살려내고 일궈내야 할 가치들이 하나둘이 아니지만, 그 가운데서도 ‘평화’는 너무도 소중한 가치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참기 힘든 갈등과 폭력과 적대에 시달려 왔기 때문이다.
식민지 백성으로 36년을 살면서 인간으로 차마 눈뜨고 못볼 일을 숱하게 보았다. 동족을 일본 경찰에 밀고하고 고문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목격했다. 특히 슬픈 것은 자존심과 평화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너져 내려갔다는 사실이다.
해방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전쟁에 시달렸다. 동족끼리 총칼을 겨누면서 죽이고 죽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이진태(장동건 역)는 바로 우리네 형이자 큰아버지였다. 인간과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할 이념이 인간과 평화를 죽이는 도구로 쓰였다. 목숨을 잃은 이가 민간인과 남북한 군인을 합해 700만에 달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다시 굶주림과 싸워야 했다.
굶주림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고 나선 군인들은 폭력을 휘둘렀다. 온 사회가 야만적인 폭력으로 가득찼다. 미행과 투옥과 고문과 공포가 최근까지 우리네 삶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고문당해 걷지도 못하게 된 어린 자식을 붙들고 통곡하는 ‘효자동 이발사’ 성한모(송광호 역) 역시 우리 동네의 보통 이웃이었던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맛보지 못한 평화였다. 간절히 갈구했지만 평화는 너무도 먼 곳에 가 버렸다. 평화가 어떻게 생겼는지 잊어버렸을 정도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잊어버렸다. 심지어 도대체 무엇이 평화인지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 그러는 사이 우리 사회는 상대를 쓰러뜨리기 위해 날뛰는 탐욕의 사회, 폭력의 사회가 되어 버렸다. ‘누가 더 독할 수 있나’를 놓고 경쟁하는 ‘독기의 사회’, ‘광기의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식민지와 전쟁과 야만의 정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학교에도 가정에도 책임이 없지 않았다. 먼저 학교는 평화를 가르쳐 주지 않았다. 평화가 왜 소중한지 가르쳐 주는 선생님도 거의 없었다. 당연히 평화를 지키기 위해 개인과 사회와 지도자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 않았다. 지금의 세상은 전쟁터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았다. 전쟁터인 이 세상을 평화의 세상으로 바꿔내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 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평화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이 중요하다고 가르쳤다. 어차피 세상은 전쟁터이니 이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쳤다. 총과 칼을 쥐어 주면서 채찍질해댔다. 나가 싸우라고. 그리고 무조건 이기라고.

평화보다 이기는 것을 가르치는 학교, 사랑보다 다툼이 많은 가정, 그리고 민중의 아픔을 외면한 종교...

엄마 아빠도 평화를 가르쳐 주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패배한 인생은 비참할 뿐이니 너는 반드시 승리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살아가라고 가르쳤다. 친구들과 싸우더라도 맞지 말고 더 많이 때려 이기고 들어오라고 가르쳤다. 왕따당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도, 친구를 왕따시키지 말라고는 가르치지 않았다. 자기 자식 기죽게 하지 않겠다며, 연대와 공동체정신과 이웃사랑의 정신은 가르치지 않았다. 몹쓸 짓, 염치없는 짓 그리고 이웃에 피해주는 짓들까지도 눈감아 주면서, 아이들을 ‘착하게’가 아닌 ‘강하게’, ‘독하게’ 키우는데 몰두했다.

자녀에 대한 직접 교육만 문제인 것도 아니다. 가정 자체가 더 이상 평화의 쉼터가 아닌 것이 더큰 문제다. 툭하면 싸움이고 이혼이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에게서 폭력을 보고 배운다. 평화의 보금자리기보다는 폭력과 불신이 판치는 지옥이 되어 버렸다.

학교도 가정도 평화를 가르쳐 주지 않는 이 야만의 사회에서 그래도 평화를 지켜내야 할 마지막 보루는 종교다. 학교와 가정이 병들었더라도 교회와 성당과 사찰만큼은 평화의 전당이지 않으면 안된다. 평화를 지키고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이가 성직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렇지가 않다. 식민지와 전쟁과 폭력에 시달려온 불쌍한 민중들을 위한 마지막 평화지킴이로서의 소명을 깊이 성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친 세상과 타협하면서 타락해 갔다. 심지어 교회가 싸움을 선동하고 성당이 증오를 부추기기까지 했다. 사찰도 각목싸움의 난장판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까지 했다. 성직자와 교회당과 사찰의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세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추한 싸움을 벌이기도 해온 것이다. 세상의 권력과 돈의 힘을 이용하기도 했다. 세상의 부도덕한 싸움과 질투와 협박에 지칠대로 지친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의 불행과 아픔을 외면하는 것쯤은 이제 일도 아니게 되었다.

2004년 5월...“이제 평화의 싹을 틔우자”

그렇다면 평화는 어디서 싹터야 하는 걸까? 평화는 무엇으로 일궈야 하는 걸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싸움과 전쟁, 증오와 폭력의 문화의 최대 피해자인 ‘민중의 위대한 각성’에서부터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그들의 절규가 평화로 싹터 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행히 우리는 그 가능성을 가까운 역사에서 이미 확인한 바 있다.
5월 광주가 대표적인 예다. 죽음을 생명으로, 폭력을 평화로, 한(恨)을 평화에의 기도로 승화시켜 낸 광주시민의 위대한 각성이 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2002년 겨울의 촛불시위’로 다시 살아났다.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에 절규하며 촛불을 들고 거리를 메웠던 2002년 겨울의 이름없는 민중들이 그 가능성을 다시 확인시켜 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증오와 적대와 죽음의 문화가 우리를 위협해 올 때마다 어김없이 다시 살아나 이 땅에 평화의 싹을 틔워내고 있다. 2004년 봄의 대통령 탄핵에 항거하는 촛불도 그것이었으며,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손에 들려진 촛불 또한 그것이었다.

이제 평화를 염원하는 촛불이 채찍 대신에 선생님의 손에 들려지길 바란다. 평화의 기도가 승리의 기도 대신에 엄마 아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길 기대한다. 가정이 폭력의 교실이 아닌 사랑과 평화의 교실이 되길 염원한다. 증오의 설교 대신에 사랑과 평화의 설교가 교회와 성당과 사찰에서 세상을 향해 퍼져 나가길 기대한다. 5월 광주가 그리고 거리의 평화촛불이 가정과 학교와 사찰과 교회당에서 부활하기를 소망한다.

2004년 5월, 어린이날, 어버이날, 부부의 날, 스승의 날 그리고 광주항쟁 기념일과 석가탄신일을 살아가면서 깊이깊이 새겨보는 필자의 ‘평화의 기도’이다. ‘평화, 오로지 평화를 위한 기도’이다.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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