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방을 정리하며.."

평화뉴스
  • 입력 2008.05.16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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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류혜숙
"너무 많음에도 결핍된 만족, 삶의 방향이 있기나 한걸까?"


일주일 중 온전히 밥벌이에 관련된 어떠한 일도 하지 않고 보낼 수 있는 날이 하루는 있다. 그날은, 밀린 빨래를 하거나, 밥을 해 먹는 수고를 수고로 느끼지 않는 즐거움을 가져 보거나, 스물 네 시간을 범죄 드라마에 투자하거나, 그것들마저 귀찮으면 시체놀이를 한다. 주 단위를 넓혀 절기로 보자면, 일 년에 두 번 하는 옷방 대 정리도 바로 저런 시간에 해치워야 하는 일이다. 바로, 이즈음, 바로 이 날이다 싶은, 오늘 같은 날.

결혼 한 동생의 옷가지들도 아직 여기저기 박혀 있고, 딸 많은 집들이 으레 그렇듯 옷이 꽤나 많은 편이다. 게다가 서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아 공동 소유가 불가능하다보니 더 많고, 심지어 똑같은 코트나 블라우스가 있기도 하다. 거기에다 한국전쟁 직후에 찍은 아버지의 사진에서 본 바로 그 잠바들이 아직도 버젓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하는 성질머리로 이걸 모두 정리하자면 각오하고, 시작해야 한다.

너무 많다. 많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다고 생각해 본적은 없었다. 가격표가 달린 셔츠가 나온다. 언제 산건지 기억에도 없다. 지난 겨울 한 번도 입지 않은 옷들이 한번이라도 걸친 것들보다 월등히 많다. 지난 여름 한 번도 입지 않은 원피스가 다시 걸린다. 방 두 개에 옷이 가득 차 있다. 너무, 많다.

"이번 봄부터 마누라가 채취해 온 나물 등속으로 음식을 장만하면서, 텃밭에서 대부분의 야채를 해결하면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물질이 과연 무엇인가' 라는 근본 질문을 자주 하게 된다.
화폐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확보하는 비율을 줄여 나가야 할 것이다.

더 많이 벌기보다, 더 적게 벌어도 되는 쪽으로 생각은 이동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의무로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을 수행할 능력은 현저하게 줄어든다.
소유하지 않으면 그 의무를 수행할 수 없고 내 생각은 점점 소유로부터 멀어지는 추세이니
이 차이는 쉽지 않은 고민을 안겨준다. 힘겨울 것이다.

오랜 시간 동안 생각과 현실이 모순되는 삶을 지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적게 소유하고도 점점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다.


내 삶의 모델케이스로 생각하고 있는 어느 부부의 사이트에서 가져온 글이다. 농촌에 정착한지 근 2년, 아직 초보 농촌사람이지만 그들의 삶을 엿보며 머지않은 내 삶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무씨를 사서 마당에 뿌려놓고 쑥쑥 자라는 모습에 감동하기도 한다.

옷을 정리하면서, 내가 미쳤지, 하는 단순한 책망으로부터 점점 커져가는 어떤 충격을 느낀다. 소유와 소비에 대한 즉흥성의 패턴을 발견하고, 만족과의 상관관계, 그리고 나아가 삶에 대한 이상과의 괴리를 또한 발견한다.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 나물을 채취하고 텃밭을 갈며 가을이면 간소한 몇 개의 과일들을 얻는 상상은 내 현재의 총체적 삶의 방향과 완전히 다른, 목가적이고 아름다운 영상에 대한 대책 없는 로맨티시즘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에게 바로, 지금, 삶의 방향이란 게 있기나 한 것일까.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본 적은 많다. 그러나 어떻게 살고 있는가 생각해 본 적 없음을 알게 된다. 지금부터라도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자발적 가난을 시작하기로 한다. 자발적 가난, 이 의지적 투쟁적 소박함의 대명사처럼 느껴지는 단어는 오히려 지나치게 거창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너무 많음에도 결핍되어 있던 만족, 그러니 방법을 달리해 보자는 생각이다. 어쩌면 그것으로부터 나의 이상적 삶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일종의, 책략인 것이다.

[주말 에세이 73]
류혜숙(평화뉴스 문화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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