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한 기자의 길" - 뉴시스 최재훈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6.01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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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가결되는거 봤나?, 이제 시민들 반응도 알아보고 슬슬 기사 준비해야지"
지난 3월12일 아침부터 출근도 않고 TV앞에 머물러 있었다. 국회에서 벌어지는 그야말로 참담한 광경 앞에서 한동안 '멍~'했다. 때마침 기사를 준비하라는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고 그제서야 또 다시 나는 기자였다.
무언가 왕창 무너져버렸다는 서글픔에, 설마했던 일들이 기어코 벌이지고야 말았다는 답답함에 손발에는 핏기가 가시고 온몸은 벌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저 "예"하고 답할 수 밖에 없었다.

촛불집회 장소로 향했다. 하나 둘 모여든 시민들의 눈빛을 유심히 살폈다. 나 못지않게 어수선해져 있을 그들의 심정도 살폈다. 마이크를 부여잡고 정리되지 않은 목소리로 '이건 아니지 않냐'며 외치는 분노의 목소리도 들었다. 가슴을 치며 답답해하던 한 젊은이의 눈물도 봤다. 그러나 나는 서서히 밝혀지는 촛불들 언저리에서 몇 명이 모여, 어떤 모습으로, 무슨 말들을 하며, 어떻게 집회를 진행하는지 메모할 수 밖에 없었다.

분통을 터뜨리지도, 노래 한 소절 따라 부르지도 못했다. 답답한 눈물 한 방울 흘릴 수 없었고 그 작은 촛불하나 보탤 수 없었다. 내게는 한없이 벅찬 '기자'였기 때문이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지난해 2월 지하철참사 현장에서도 그랬다.
고통과 통곡의 순간에서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두려움과 착잡함을 억누르고서 현장을 헤짚고 다녀야 했다. 잃어버린 가족을 찾아 울며 불며 발을 구르고 있는 이들에게서 애뜻한 사연들을 건져야 했고 매쾌한 연기로 가득찬 열기가 채 가시지도 않은 지하철 전동차에서 출입문이 닫혔는지, 열렸는지를 살펴야 했다.
또 불과 며칠도 지나지 않아 숨져간 사람들의 보상금이 얼마인지를 챙겨야 했고, 울분에 못이겨 점점 거칠어지는 유족들에게 현행법률을 들이대며 냉혹한 지적도 해야 했다.

그렇게 결국 '해야 할 일'에만 매달렸던 내가 몹시도 부끄러웠는지 여태까지 고인들의 영정 앞에 국화 한 송이 제대로 놓지를 못했다.
힘겨웠던 순간이며, 그때의 기억이 아직도 힘겹다. 기자이기 때문일꺼다.

취재수첩을 들고 기자라는 이름으로 마주치는 현장들은 언제나 내게 부담스럽고 어려울 따름이다. 어떠한 순간에도 건조한 눈빛을 유지해야 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절묘한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

감히 이해조차 할 수 없을만큼 엄청난 일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이름과 나이, 주소를 알아내야 하며 이들에게 뺨 맞을 각오로 '지금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물어 답을 얻어내야 한다. 더군다나 아무리 화가나고, 슬프고, 기쁘고, 즐거울지라도 내 감정과 생각 따위는 꼭꼭 숨겨야만 한다.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또 논리적이고 사실적인, 기자라는 직업윤리에 부합하는 '올바른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당연히 지켜야 할 것들이 아닌가.

쉽게 흥분하고 작은 일에 감동받는 지극히 평범한 나로써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옳고 그름, 밝고 어두움, 선함과 악함, 권력과 무력, 자유와 억압, 의미와 무의미, 정직과 기만... 무언가를 판단하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묻고, 그래서 자책한다.
'기자'이기에 터무니없이 부족한 내가 '기자'라는 힘겨운 역할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와 투지를 작게나마 간직하고 있는지를.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마치고 북으로 떠나는 미녀응원단의 버스 뒤에 숨어 누가볼까 몰래 훔쳤던 내 눈물은 '기자'이고 싶은 나를 여지껏 출발선에 머물게 했다.

뉴시스 최재훈기자(jhchoi@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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