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땅, 투박한 '통밀'에 매료되다"

평화뉴스
  • 입력 2008.11.07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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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세이] 이진이
"음식에 불신이 없던 시절, 왜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는지.."

우리 밀...2008년 봄, 전라남도 구례에서..(사진.이진이)
우리 밀...2008년 봄, 전라남도 구례에서..(사진.이진이)

어릴 때부터 빵을 좋아했던 나는 빵을 만드는 사람들을 늘 놀라운 눈으로 쳐다봤다. 빵이라는 게 밥과는 달라서, 밀가루 이외에도 이스트나 버터 같은 특별한 재료가 있어야했고, 오븐도 필요했다. 어머니가 해주시던 한국식 가정 음식이 전부였던 우리 집에 그런 별난 식재료와 기구가 있을 리 만무했다. 빵을 만들어보면 알겠지만, 자잘하게 필요한 것들이 하나둘이 아니다. 그래서 내게 빵은 늘 제과점에서 사먹는 것, 별미로 한번씩 맛보는 것일 따름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많이 변했다. 요즘은 오븐 있는 집도 많고, 제빵에 필요한 재료들도 손쉽게 구할 수 있다. 거기다 먹거리 안전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집에서 과자나 빵을 구워먹는 사람들이 더 이상 ‘특별한’ 축에도 끼지 않게 돼버렸다. 마음만 먹으면 집에서도 꽤 맛있는 빵을 만들 수 있는 세상이 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보다는 좀더 특별한 빵을 원하게 되었다. 수입한 하얀 밀가루에 버터와 설탕이 듬뿍 들어간, 고소하고 감칠맛 나는 ‘맛있는’ 빵이 아니라, 설탕과 버터도 넣지 않은 거칠고 소박한 통밀빵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밀, 그것도 통밀의 존재를 제대로 알게 된 건 2,3년전 쯤이다. 통밀로 건강한 빵을 만드는 사람을 인터넷을 통해 알게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그이는 전라남도 구례에 살고있는데, 원래 직업은 빵과는 전혀 관련없는 웹디자이너였다. 서울에 살다가 지리산 자락으로 이주한 이들 부부는 구례에 정착해 살면서 우리밀에 대해서 재미난 실험들을 하고 있다. 남편은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아내는 일을 하면서 건강한 빵 만들기에 몰입 중이다.

그이는 우리 땅에서 자란 통밀로, 유럽 농부들이 주식으로 먹어온 빵을 만들고 있다. 만드는 법을 자기 블로그에 올려서 수많은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나 역시 그의 혜택을 입은 사람이다. 그저 우리밀과 물, 약간의 이스트와 소금만 있으면 빵을 만들 수 있다. 버터도 들어가지 않고, 설탕도 필요없기 때문에 투박하지만, 우리 통밀의 구수한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그런 빵이다.

참 재미있는 것은, 통밀빵을 만들면서 빵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뀌고, 더 나아가서 음식에 대한 생각도 변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구례 사는 그이가 만드는 빵에 관심이 많았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빵을 통해 실천하고 있는 삶의 양식에 끌리게 됐다. 향신료와 방부제, 각종 첨가제가 들어가지 않은 빵, 오로지 농부의 땀과 자연의 축복 끝에 태어난 밀의 맛을 온전히 살린 빵을 통해, 그이는 자연과 인간의 친화를 이야기한다. 자연 앞에서 겸손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음식은 때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규정한다. 우리가 식재료를 어떻게 구하고,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방식으로 조리하고, 또 누구와 함께 먹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진다. 한 인간의 삶의 양식은 물론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사람을 대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다. 너무 비약하는 것이 아니냐고? 그렇지 않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는 것과 텃밭에서 직접 키운 채소를 먹는 것에는 차이가 있지 않겠는가? 적어도 나는 통밀을 통해 빵을 만들면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통밀에 매료된 이후부터 우리집에서는 하얀 밀가루가 사라졌다. 우리밀을 직접 기르는 농부가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직접 밀가루를 사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빵 뿐만 아니라, 전을 부쳐먹거나 국수를 만들어먹을 때도 통밀의 투박함을 더 사랑하게 됐다.

통밀로 손국수를 만드시는 어머니...(사진.이진이)
통밀로 손국수를 만드시는 어머니...(사진.이진이)
그러던 중 지난 봄,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서 ‘세상에서 가장 귀한 밀’을 선물받았다. 농부가 되고 싶어하는 그는 대구 근교에 땅을 조금 마련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 흔하디 흔한 주말농장이 아니라, 그가 직접 땅을 개간하고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아가면서 갖가지 작물들을 키우고 있다. 밀은 그의 회심작이었다. 작년에 처음으로 밀알을 심었고, 올봄에 드디어 수확을 한 것이다.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농약은 물론이고 제초제도 쓰지 않고 키운, 깨끗하고 귀한 밀이었다.

평소에 내가 하도 통밀, 통밀.. 하고 노래를 하니까, 그 밀을 방앗간에 가서 직접 갈아와 나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밀을 받아든 순간, ‘밀가루가 이렇게 예쁘다니...’ 싶었다. 시중에 파는 밀가루처럼 곱게 빻은 것이 아니었다. 도정을 하지 않아서 노란 밀겨가 다 보이는, 살아숨쉬는 통밀이었다. 오직 땅의 힘과 햇빛과 비의 축복, 그리고 부지런한 농부의 땀방울로만 지은 진짜 우리밀이 내 손 안에 들어온 것이다. 어찌 이 밀이 아름답지 않겠는가?

그 밀로 빵을 만들어보았다. 물과 이스트, 그리고 약간의 허브와 견과류를 넣고 만든 소박한 빵이었다. 식감은 거칠었다. 속이 뽀얗고 보드라운 보통 빵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대신 자연 그 자체를 씹는 듯한 충만감이 밀려왔다.

부족한 솜씨였지만, 빵을 더많이 만들어서 직장 사람들과 나눠먹었다. 물론 밀을 생산한 그가 가장 먼저 맛을 보았다. 자신이 키운 밀이 빵이 되어 식탁에 오른 것을 보았을 때, 기분이 어땠을까? 그때 누군가가 한마디를 거드는데, 그 말이 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밀을 키운 사람과 그 밀로 빵을 만든 사람 앞에서 빵을 먹고 있네요. 제과점에서 사먹을 때엔 느껴보지 못한 묘한 기분이에요.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자리에 앉아있는 거잖아요.’

모든 먹거리들이 이런 식으로 유통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적어도 음식을 앞에 놓고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비극적인 상황은 벌어지지 않을테니.

며칠전에는 어머니와 함께 통밀로 손국수를 밀어 먹었다. 어머니는 국수를 밀면서 그 옛날 집에서 농사지은 밀을 빻아서 온 가족이 둘러앉아 국수를 만들어먹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궁핍했지만, 음식에 대한 불신이 없던 시절의 이야기, 그게 왜 아득한 전설처럼 느껴지는지, 그게 참 씁쓸했다.

 

 

 

[주말에세이75] 이진이(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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