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자본주의, 사회지배력을 회복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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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성 칼럼]
"미국식 3대 보수의 몰락...경제도 사회 속에서 풀어야"

세계 유일초강국 미국이 버락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선택하면서 새로운 역사, 새로운 시대를 여는 문명사적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선택지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 근본 원인은 오랫동안 축적된 미국사회의 정치, 경제, 사회적 모순의 폭발이다.

그동안 미국사회는 3대 보수, 말하자면 업계로 대표되는 시장 보수, 체니와 럼스펠드 등으로 대표되는 안보 보수 그리고 강경기독교 세력으로 대변되는 사회 보수가 형성한 강력한 카르텔에 의해 지배되어 왔었다. 그러나 시장 보수는 탐욕, 안보 보수는 오만 그리고 사회 보수는 나태로 인해 스스로 균열과 몰락을 자초하고 말았다.

하지만 저 역류할 수 없는 시대적 변화를 마주하고 있는 한국사회는 전혀 다른 곳으로 정향되어 있는 듯하다. 마치 미국식 3대 보수가 한국사회에서 새롭게 꽃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2008년 현재 미국과 전 세계에서 연출되고 있는 정치경제적 지형이나 혹은 그 여파로 한국사회가 겪고 있는 민주주의와 경제적 위기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칼 폴라니가 『거대한 변환』에서 분석했던 19세기의 문명사를 비껴갈 수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폴라니에 따르면, 19세기 문명은 4가지 제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그것은 첫째, ‘세력균형체제’, 둘째, ‘국제 금본위제’, 셋째, ‘자기조정적 시장’경제체제, 넷째, ‘자유주의 국가’였다.

그러나 그는 19세기 문명, 즉 시장경제체제가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기묘한 논리 위에 서 있다고 보았다. 시장은 인류의 역사에서 계속 존재해 왔으나, 시장경제가 경제를 주도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19세기의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에서는 오직 현금과 현물만 존재할 뿐이지만 인류는 오랜 역사적 발전과정에서 그러한 관계를 기피해왔던 것이다. 시장경제체재는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적 관계망’을 파괴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관계망을 작동시키는 기본적인 세 가지 원칙은 ‘상호성’, ‘재분배’ 그리고 ‘자급자족’이었다. 19세기 시장경제는 사회적 관계망으로서의 상호성, 재분배 그리고 자급자족을 파괴한 시스템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시장경제체제는 19세기에 등장하게 되었을까?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의 6장에서 그 원인을 ‘기계’의 등장에 두고 있다. 기계 자체의 단가가 높기 때문에 기계로 생산된 모든 것은 팔아야만 했다. 또한 언제나 생산과 소비가 가능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기계에 투입되는 생산요소를 상품화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 결과 인간과 토지에 대한 상품허구가 나타나고, ‘인간을 상품으로 여기는 기묘한 메커니즘’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인간시장’이 탄생하게 되었다. 기계가 등장한 산업혁명 시기에는 경제 발전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어쩌면 기계를 대신해서 정보와 지식이 주도하는 오늘날의 금융자본주의 역시 그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악마의 맷돌, 즉 시장의 자기조정적 경향은 시장경제체제 내에서 사람과 노동, 원자재, 화폐가 모두 상품화된 상황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을 야기하게 된다. 예컨대 노동조합이나 중앙은행의 탄생 등은 사회의 자기보호운동의 일부이다. 19세기 말에서 1940년대까지 시장의 ‘자기조정기능’과 ‘자기보호운동’은 상호 반동적 관계로 기능한다. 자유주의자들은 19세기의 보호주의나 군국주의가 역사의 ‘변종’이라고 생각하지만, 폴라니는 그러한 역사관을 뒤집는다. 오히려 보호주의나 군국주의가 이성적 역사의 작동, 헤겔식으로 말하면 ‘이성의 간계’였던 것이다.

폴라니에 따르면, 인간과 토지, 화폐와 노동을 전면적으로 상품화 하려는 시장경제 자유주의자들의 생각은 유토피아에서만 존재할 뿐이지, 현실에서는 완전하게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인간이 끊임없이 “나는 상품이 아니야”라고 외치면서 노조를 결성하고 입법을 통해 그들의 권리를 보호하려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렇다면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이 100% 완벽하게 작동될 수 없는 메커니즘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주류 경제학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이 여전히 시장의 자기조정 기능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19세기 문명의 4가지 제도에 대한 광신적 믿음 때문은 아닐까. 아니면 1930년대의 대공황, 그리고 연이어 등장한 파시스트들과 공산국가들의 등장이 그들에게 과거에로의 회귀를 자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폴라니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가 다시는 19세기 문명으로 복귀하려는 시도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19세기 문명으로 되돌아갈 수도, 파시즘과 공산국가를 긍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폴라니가 선택한 대안은 고전적 ‘자유’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하는 것이었다. 19세기적 의미의 개인적 자유는 이미 종결되었고, 시장과 국가가 인간의 모든 욕망과 자유를 통제하던 1930-40년대의 집단의 자유에 대한 새로운 정의는 『거대한 변환』의 마지막 장인 21장에서 희미하게나마 그 윤곽이 그려진다. 그것은 사회의 현실과 개인의 자유를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서구 기독교 사상에서 비롯되는 ‘내면의 자유’, 혼자만의 자유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가능케 하는 ‘연대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굳이 동양적 사유구조로 말한다면, ‘관계론적 자유’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폴라니의 대안이 제시되고 64년이 지난 오늘날의 세계상황은 어떤가? 신자유주의와 그 결과로서의 세계화란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 19세기말에서 1940년대의 상황과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세계체제론적으로 보더라도 한국사회 역시 그 언저리에 걸쳐 있다. 적어도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주식과 펀드를 비켜갈 수 없고, 아파트와 땅값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 우리의 모든 살림은 사회를 벗어나 이미 고삐 풀린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한복판에서 움직인다. 어쩌면 19세기적 시장 경제적 삶의 방식의 구체적 현실태다.

우리의 살림은 오직 경제적 성장에만 올인 되어 있다. 시장 중심의 경제에 바탕한 개인의 자유가 다양한 차이들을 인정하는 사회 현실을 기반으로 한 연대의 자유를 우선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살림이 하나로서 전체가 되는 만큼 ‘경제도 사회 속에서 보아야 한다’는 폴라니의 진단이 전하는 메시지가 21세기 벽두 한국사회에서 유의미한 이유는 경제가 사회와 적절한 관계맺음 속에 존재해야 하는 것이지 결코 사회로부터 벗어나서 독자적으로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의 살림 방식은 시장 주도의 경제력에 대한 사회지배력의 온전한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는 데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는 특히 2008년 현재 여러 지형에서 시장 보수, 안보 보수 그리고 사회 보수의 전면적인 공격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한국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아주 긴급하고 절박한 문제가 될 것이다. 정녕 우리는 호모폴리티쿠스(Homo politicus.정치적인간)를 포기하고 호모 에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 영리적 인간)에 머물고 말 것인가? 그 선택도 결국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이재성 칼럼 2]
이재성(계명대 교양학부 철학 교수. 대구사회연구소 기획실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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