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참 기자인가?" - 대구일보 노인호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6.07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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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란 일을 시작하는 나에게 내 인생의 지도 같은 선배가 해준 이야기로 힘든 고백을 시작할까 한다.

왕의 말이 곧 법이던 절대 군주 시대. 다리가 한쪽 밖에 없는 군주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를 불렀다. 불려온 화가는 외다리인 군주의 모습을 실제와 똑같이 그렸고, 완성된 그림을 본 군주는 외다리인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그려 자신을 기만했다는 이유로 화가를 극형에 처했다.

자신의 모습을 후대에 남기고 싶었던 군주는 또 다른 화가를 불러 자신을 그리도록 했다.

주변 사람들을 통해 이전에 화가가 죽게 된 사연을 들어 알고 있던 두 번째 화가는 군주의 다리가 두 쪽 다 있는 것으로 군주의 모습을 그렸다. 이번에도 화가는 극형에 처해졌다. 군주의 모습을 실제와 다르게 거짓으로 그렸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세 번째로 군주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는 살아 남았고 군주도 상당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 화가를 죽은 이유를 생각한 세번째 화가는 임금의 모습을 정면이 아닌 측면에서 그려 한쪽 다리만 그렸지만 누가 봐도 외다리인지, 정상인지 알 수 없게끔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만약 내가 세 번째 화가였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분명히 진실은 첫 번째 그림이지만 나 또한 세 번째처럼 행동을 했을 것이다.

기자 생활을 하는 1년여동안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확한 사실도 아닌 것으로 내가 다치지 않을 시각의 기사만 써왔다.

얼마 전 유흥업소에서 탈출(?)한 여성 5명의 기자회견이 있었다.
숨까지 헐떡이며 그간의 힘들었던 생활을 고백하던 그들을 바라보며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착취될 수 밖에 없는 구조속에서 일을 했다고 하지만 처음 그곳에서 일을 하기로 마음 먹고 그길을 선택한 것은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또 상당히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이들이 싣고 있던 구두는 서민들이 구입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명품이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정말 땀흘리며 살아온 여성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 행여나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면 그들이 명품 신발을 싣고 있었을까? 유치할 수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자들이 쓰고 있는 기사의 내용은 '선불금'이란 쇠창살에 갇혀 있다 힘겹게 탈출한 여성들의 인권유린 실태와 세무서 직원에 대한 성 상납이었다. 나 또한 대세에 따라 기사를 써내려 갔다.

정작 내가 하고 싶었던 말들은 여성인권단체들의 질타가 무서워 슬그머니 생각지 못했던 것처럼 지나쳐 버렸다. 내 생각이 짧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혹시 나에게 올 피해나 귀찮음이 두려워 얄팍한 시각으로 기사를 적었다.

이런 경험은 이날 뿐이 아니었다.
뒷 탈(?)이 무서워 또 다른 이면을 알면서도 취재를 하지 않았거나 취재를 했다고 해도 지면으로 옮기지 못한 경우도 종종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어떤 이는 편지를 적을 때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란 말 대신 '보냄'과 '받음'이라고만 적는다고 했다. '참사람' 구실은 도저히 못할 것 같고 '가짜 사람' 노릇을 하고 싶지 않아서 란다.

나는 내가 쓴 기사의 마지막에 아무런 고민 없이 내 이름과 그 옆에 기자란 말을 적는다. 아직 '참기자'도 아니면서 그냥 겁없이 막 적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참기자' 되기가 '가짜 기자' 되는 것보다 더 힘들지만 좋은 것이란 걸 알고 있고, 참기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과 내 주변에 날 참기자로 이끌어줄 선배들이 있다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지 않기에 이 글을 마치는 지금에도 한 없이 걱정스럽다.

대구일보 노인호(inho@idaegu.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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