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을 덜어주는 게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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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자장면 무료급식 박권용씨..."봉사로 내 인생 잘된 거 같아"

30여년 자장면 무료급식을 해 온 박권용(56)씨.(2009.1.28 / 사진.남승렬 기자)
30여년 자장면 무료급식을 해 온 박권용(56)씨.(2009.1.28 / 사진.남승렬 기자)

"의사가 의술로 봉사를 펴듯이 지는 면 뽑는 기술로 남 돕는기라예"

자신보다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시작한 '짜장면' 무료 순회봉사가 어느덧 30여년. 어느 동네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중국집을 운영하는 박권용(56)씨의 지난 30여년 삶이다.

28일 오후, 대구시 남구 봉덕3동 중화요리집 동해반점에서 만난 박권용씨는 "비록 못 배우고 천하게 태어났지만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말없이 기쁘다"고 했다. 자장면 속에 담긴 박씨의 이웃 사랑은 소박하다. 가난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자신의 기술과 노력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배고픔을 덜어주는 게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박씨는 "의사가 의술로 봉사를 펴듯이, 배운 것 없는 나는 면 뽑는 기술로 남을 돕고 있다"면서 "배고픈 삶을 너무나 잘 알기에 언젠가 돈을 많이 벌면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소년 시절의 다짐이 여태껏 자장면 무료급식 봉사를 해올 수 있었던 힘"이라고 말했다.

중화요리집 '뽀이'에서 이웃 돕는 '자장봉사자'로

박씨는 매주 일요일마다 자신을 찾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최근에는 주로 대구지역 교회를 돌며 자장면 급식봉사를 하고 있으나, 불러만 주면 전국 어디든지 찾아가고 있다. 지난 4일에는 경남 양산의 한 교회를 찾아 300여명에게 '자장봉사'를 했다. '2월 1일 달성제일교회, 2월 8일 새칠곡교회, 2월 15일 군위 나호교회, 2월 22일 영동 제일교회'... 가게 한 켠에 걸려있는 달력 매주 휴일에는 그가 찾아야 할 곳이 빨간 싸인펜으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박씨는 "올 4월말까지는 자장봉사를 해야 할 곳이 다 예약돼 있다"면서 "올 한해는 매주 빠지지 않고, 봉사를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무료 자장면 봉사를 갈 때마다 300인분 이상을 준비한다. 재료값만 해도 30여만원이 든다. 가게 보증금 1천500만원에 월세 30만원을 내는 박씨에게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그는 "언젠가 김천 지례면에 큰 물난리가 났을 때는 면민 1천여명에게 자장면을 준 적도 있다"면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는 돈이기에 아깝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며 웃었다.

박씨의 가게에는 '동해반점'이란 간판 외에 간판 하나가 더 걸려 있다. '실직자를 위한 무료급식소'. IMF 외환위기 당시 실직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 10년이 넘었다. 지금도 박씨의 가게에는 하루 평균 10여명의 홀몸어르신과 실직자들이 찾아와 자장면을 먹고 간다.

자장면 속에 담긴 이웃 사랑. 그 계기가 궁금했다.

박씨는 1953년 경남 합천 봉산면의 작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가정불화로 어머니는 그가 세 살 때 집을 나갔다. 새어머니 손에 길러진 그는 친모에게 버려진 고통보다 배고픔의 고통이 더 컸다고 했다. 돈이 없어 초등학교도 3학년 때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다.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카데예. 먹고 사는데는 우동 뽑는 기술이 좋으니 니도 그거 한번 배워봐라" 그 말은 들은 박씨는 곧바로 대구로 왔다. 그 때 나이 11살. 초등학교 중퇴의 학력을 가진 그가 할 만한 일은 별로 없었다.

"뭐를 좀 배웠어야 취직을 하지예. 북성로 한 중화요리집에 '뽀이'로 들어가 일을 했던 게 자장면과의 첫 인연이라예"

연탄 깨뜨려 서럽게 울던 소녀

중국집에서 일은 했으나 자신의 허기조차 채우기 힘든 박씨에게 봉사를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계기가 생겼다. 대구로 온 지 2년쯤 흐른 추운 겨울, 배달을 하던 도중 박씨는 길거리에서 울던 한 소녀를 봤다. "'니 와 카노'하고 물으니 소녀가 울며 말합디다. '연탄을 깨뜨려 오늘 냉방에서 자게 됐어예'라고. 그 말을 들으니 어찌나 가엽게 보이던지요" 연탄 2장을 깨뜨려 서럽게 울던 소녀의 모습에 마음 아파한 박씨는 자신의 봉급을 털어 연탄 50장을 소녀의 집에 전했다. 그 후 소녀와 그 어머니는 박씨를 볼 때마다 깍듯이 인사를 건네며 고마움을 전했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가 인사를 받다니. 아, 존중이란 것은 자신의 노력으로 받게 되는구나'

그는 생전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았다는 생각에 너무나 기뻤다. 이 일 이후, 박씨는 고된 배달 일도 '돈을 많이 벌면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다짐으로 견뎌냈다. 23살 되던 1975년에는 아내 구영숙(54)씨를 만나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다. "우리 집사람이요? 구미 가는 열차칸에서 처음 봤지예. '나하고 결혼하면 맛있는 거 많이 먹을 수 있슴더'라고 말해 결혼까지 하게 됐지예"

아들 둘을 낳은 박씨는 형제 모두 목회자로 길러냈다. 맏아들 성관(33)씨는 안산 동산교회 목사로 있으며, 둘째 성훈(31) 박씨도 강도사 시험을 합격해 오는 8월이면 목사가 된다.

결혼 1년 후 박씨는 13년간 일해 온 중국집을 나와 대구 평리동에 '명월반점'이란 자신의 중화요리집을 열었다. 성실함과 인사성으로 단골이 생기고, 몇 년이 흐르자 돈도 꽤 모아졌다. 그간 모은 돈을 의미 있게 쓰고 싶었던 그는 한 지역언론을 통해 김천의 딱한 여고생의 사연을 접했다. "김천에서 포장마차 하는 아줌마 딸이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 가게 됐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그동안 모은 돈으로 그 여고생의 입학금을 대신 내줬심더. 소년 시절 때 남 돕자고 다짐한 뒤 처음으로 한 봉사였지예"

사랑의 자장면 아저씨..."봉사로 내 인생이 잘 된 거 같아"

이후 박씨는 직접 만든 자장면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대구는 물론, 안동과 구미를 비롯한 경북지역, 자신을 찾는 곳이면 전국 어느 곳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국의 고아원과 양로원, 군부대를 찾아 사랑의 자장면을 전하는 박씨를 주변에서는 '사랑의 자장면 아저씨' 혹은 '자장박사'로 부른다. 이 외에도 박씨에게는 또다른 애칭이 있다. 소위 말하는 '명강사'. 초등학교 중퇴란 최종학력에도 불구하고 박씨는 전국의 대학과 공무원 연수원, 군부대, 교도소 등을 돌며 전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지금도 매주 금요일마다 대구교도소와 청송교도소 등을 찾아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깨친 나눔과 인생의 참 의미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그는 "강연비로 받은 돈으로 가장 먼저 밀가루를 산다"며 웃으며 말했다.

선행을 베푼 사람에게 감사편지를 받은 일을 비롯해 30여년 봉사를 해오면서 기억에 남는 일도 많다. "1992년에 불법체류 중인 한 중국교포가 암을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지예. 사정이 하도 딱해 불법체류로 생긴 벌금 30만원을 대신 내주고 수술 시켜줄라 카는데, 병원에서 그 사정을 알고 무료로 수술을 시켜줬심더. 수술 후 중국으로 돌아간 그 교포가 크게 성공했다는 소식과 함께 감사편지를 보내와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예. 또 뒷바라지를 한 장기수의 아들이 고시에 붙어 합격통지서를 들고 찾아왔을 때도 보람을 느꼈심더"

나이가 들어 면을 뽑아내지 못할 때까지 자장면을 통한 이웃 사랑을 계속할 것이라는 박씨. 그가 말했다. "나무에 잎이 없으면 죽은 나무이듯 내 인생도 봉사가 없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예. 봉사 때문에 내 인생이 다 잘된 거 같아예. 절대 후회없는 삶입니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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