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편에 선 사제, 큰 별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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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 선종>...대구 3인의 사제 "굳은 신념, 사랑 크신 분"

(사진.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
(사진.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

한국 천주교회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이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선종(善終)했다(향년 87세)는 소식이 알려지자, 고인의 고향인 대구경북의 사제와 평신도들은 큰 슬픔에 잠기며 고인의 넋을 기렸다.

고 김수환 추기경은 1922년 대구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막내로 출생해 1951년 사제 서품을 받았고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특히, 어린 시절을 경북 군위군에서 보냈을 뿐 아니라, 지난 1951년 9월 대구 계산동 주교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된 뒤 경북 안동성당 주임신부로 사제의 첫 발을 내디뎠고, 김천성당 주임신부와 가톨릭신문(본사 대구) 사장을 지내는 등 대구경북과 각별한 인연을 가졌다. 

"유신 때 곧은 글, 신문 1면 백지 발행"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활동을 한 포항 흥해성당 원유술 주임신부는 "큰 별을 잃었다"며 "나라가 어려울 때 중심을 잡으신 분"이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원유술 신부는 특히, "박정희 유신정권 때는 굳은 신념으로 곧은 글을 썼고, 그 글이 신문 1면에 백지로 나올만큼 큰 의미를 줬다"면서  "또, 지난 80년대 울릉도에 큰 태풍이 일자, 손수 엽서를 보내 신자들과 주민들의 아픔을 달래주시기도 했다"며 고인의 사랑을 기억했다.  

"가장 어려운 데 써라...하늘에서 다시 만나자"

경북 경주시 산내면 산내성당 이창수 주임신부도 "정말 사랑 크신 분"으로 고인을 추모했다.

이창수 신부는 '로마' 유학과 사목시절 기억 2가지를 떠올렸다. "지난 2000년 추기경님이 로마에 오셔서 견진성사를 주셨는데, 견진 예물로 30만원을 드리니까 '이거 내꺼제, 내 꺼니까 내맘대로 해도 되제' 하시며 '가장 필요한 데, 가장 어려운 데 니가 써라'고 다시 내게 주셨다"고 소개했다.

또, "2001년 로마 한인신학원 축복식 때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김 추기경님께서 축복식을 마치고 헤어질 때 서로 안으시며 '이제 언제 또 보겠나, 하늘에서 다시 만나자' 하시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고 고인을 기억했다.

"인권과 민주...반대 세력도 안으신 분"

대구 출신의 한 수도회 신부는 "교회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분"이라며 "우리 민족의 착한 목자"라고 고인을 기렸다. 이 신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에 따라 '세상에 열려있는 자세'를 스스로 실천하며 '문을 닫은 교회'를 바꿔 세상과 교회에 기쁨과 희망을 준 사람"이라며 "그 당시 시대정신인 '인권'과 '민주'를 그대로 실천했다"고 기억했다.

특히, 이 신부는 "반대 세력까지 안아 주신 분"으로 고인을 기억했다. 그는, "미국 교포사목 때 김 추기경님과 저녁식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 주교돼서 서울 오니 경상도 촌놈 올라왔다고 앉으면 앉는다고, 서면 선다고 투덜거린다며 힘든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면서 "보수적인 신부, 자신을 싫어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끌어안으신 분"이라고 말했다. "교회 안팎에서 싫어하고 반대하는 사람까지 같이 안아 주신 분"이라며 고인의 선종을 애도했다.

"빈민촌과 쪽방 찾으신 추기경"

우리신학연구소 박영대 소장은 "가난한 편에 선 사제"로 고인을 기억했다.

박영대 소장은, "개인적으로 만나적도 없고 책이나 한 다리 건너 들었을 뿐이지만, 늘 가난한 사람 편에서 교회 전체에 바로미터 역할을 하셨고, 그 분의 처신 하나 하나가 은연중에 한국 교회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보여줬다"고 고인의 삶을 기렸다. 특히, "한때 주교들이 현장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김 추기경은 당시 빈민촌과 쪽방을 찾으셨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또, "말년에 김 추기경이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을 하시거나 적절하지 않을 때 정치인들을 만난 것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항상 교회의 수장으로서 세상과 사람들을 걱정하고 교회의 가치를 견지하며 초기일관 했던 것 같다"고 기억했다.

(사진.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
(사진.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http://cardinalkim.catholic.or.kr)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 서임된 고인은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의장과 아시아천주교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1998년 정년(75세)을 넘기면서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했다. 특히, 고인은 1971년 성탄 밤미사에서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는 강론을 하며 유신독재와 싸웠고,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때는  명동성당으로 쫓겨온 수백명의 시위대를 검거하기 위해 대치하고 있던 경찰을 향해 "나를 밟고 가라"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한편, 천주교 안동교구는 안동 목성동성당에 분향소를 마련하고 17일 저녁에 선종미사를 올리기로 했다. 대구대교구도 김 추기경이 사제 서품을 받은 중구 계산성당에서 17일 오전 11시에 공식 분향소를 설치하는 한편, 장례 기간에 매일 오전 11시30분과 오후 3시, 오후 7시 등 하루 3차례 추모 미사를 거행할 예정이다.

 


<김수환 추기경 약력>  

▲1922년 5월8일(음력) = 대구 출생
▲1941년 = 서울 동성상업학교 졸업 후 일본 동경 상지대 입학
▲1942년 = 상지대 문학부 철학과 진학
▲1944년 = 2차 대전으로 학업 중단
▲1947-51년 =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 신학전공
▲1951년 = 사제서품 및 대구 대교구 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3년 = 대구 대주교 비서 신부
▲1955-56년 = 대구 대교구 김천시 황금동 천주교회 주임신부
▲1956-63년 = 독일 뮌스터대 대학원 사회학전공
▲1964년 = 주간 가톨릭 시보(현 가톨릭신문) 사장
▲1966년 = 마산교구 주교 서품 및 마산 교구장 착좌
▲1967년 이후 = 교황청 세계 주교 시노드(대의원회의)에 한국대표로 6차례 참석
▲1968년 = 서울 대주교 승품 및 서울 대교구장 착좌
▲1969년 =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 서임
▲1970-75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1차 역임)
▲1970-73년 =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위원장
▲1975-98년 = 평양교구장 서리
▲1981-87년 =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2차 역임)
▲1998년 = 서울대교구장 은퇴, 아시아 주교회의 공동의장
▲1998-99년 = 실업극복국민운동 공동위원장, 자녀안심하고 학교보내기운동 국민재단 초대 이사장
▲2001년 = 사이언스 북 스타트운동 상임대표
▲2003년 = 생명21운동 홍보대사
▲2009년 2월16일 = 선종

<명예학위>
▲1974년 = 서강대 명예문학박사
▲1977년 = 미국 노틀담대 명예법학박사
▲1988년 = 일본 상지대 명예신학박사
▲1990년 = 고려대 명예철학박사, 미국 시튼홀대 명예법학박사
▲1994년 = 연세대 명예신학박사
▲1995년 = 대만 푸젠 가톨릭대 명예철학박사
▲1997년 = 필리핀 아테네오대 명예인문학박사
▲1999년 = 서울대 명예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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