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에서 찾은 "희망의 싹"

평화뉴스
  • 입력 2004.06.22 00:4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덕률 칼럼 19.<평양을 다녀와서>
“변화하는 북한...대구도 한민족 민간교류를”




지난 주 수요일, 그러니까 6월 16일이었다. 이른 아침, 필자는 설레는 가슴을 안고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 심양을 거쳐 평양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대구에서 <(사단법인) 한민족 민간교류협의회>의 설립을 준비해 온 10명의 지인들과 함께 했다. 대부분 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이었으며 북한의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몇 분의 사업가도 참여했다. 단체 설립의 추진위원장을 맡아온 윤덕홍 전교육부총리가 방북단을 이끌었다.

방북은 그 자체만으로도 필자에겐 큰 감격이었다. 어디 필자만이겠는가? 일행들 모두가 설렘으로 들뜬 표정이었다. 심양에서 잠시 머문 뒤 갈아탄 평양행 비행기는 북한의 고려항공 여객기였다. 꽤 오래돼 보이는 소형 비행기였다. 드디어 심양공항을 이륙했다. 온갖 곡절을 뚫고 준비되어 온 방북이 마침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소형 비행기여서 그런지 무척 사뿐히 나는 느낌이었다. 비행 고도도 매우 낮았다. 비행기 차창 밑으로 산이며 강, 들녘과 민가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였다. 필자는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드디어 압록강이 눈에 들어 왔다. 이제부터는 북녘 땅인 것이다.

필자의 심장도 고동치기 시작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만감이 교차했다. 북녘의 고향을 끝내 보지 못하고 몇 년 전 눈을 감으신 선친과 장인어른의 생전 모습도 떠올랐다. 꼭 4년 전, 역사적인 남북 정상회담 장면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날이 오기까지 우리 민족이 헤쳐 온 고난과 극복의 여정이, 그리고 고비 고비마다에서 통일로 가는 계단 하나하나를 힘들게 쌓아온 통일 역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평양 순안공항에는 대구를 떠난 지 10시간만인 오후 5시 반경에 도착했다. 작은 규모의 공항청사와 옛 티 나는 입국 절차에 당혹스럽긴 했지만, 마치 고향 같은 푸근함과 마중 나온 북측 관계자들의 환대에 내 마음은 다시 설렘으로 차 올랐다. 소리라도 한번 크게 질러보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지만 참았다. 그로부터 3박 4일. 비록 짧은 일정이었지만, 필자에게는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던 너무도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의 방북 목적 가운데 하나가 북한의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을 민간 차원에서 모색하는 것이어서 더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북한 주민의 어려움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자동차 차창 너머로 바라본 평양 주민들은 대부분 깡마른 모습에 지친 표정이었다. 평양을 벗어나면 사정은 더 딱해 보였다. 멀리 평안북도 묘향산의 국제친선전람관에서 스쳐 지나친 주민들은 대부분 작은 체구에 검고 힘든 표정들이었다. 이미 보도를 통해 많이 듣고 본 내용이지만 직접 마주 대하는 내 마음은 찢어지듯이 아파 왔다.

굶주림과 싸웠던 고난의 행군...그 속에 틔운 “희망의 싹”

북한의 생산력은 너무도 낙후해 보였다. 남한의 경제력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평양 시내의 넓은 도로에도 자동차가 많지 않았다. 달리다 고장난 자동차를 세워 놓고 수리하는 광경도 자주 목격됐다. 150여 킬로미터 정도 되는 평양-향산 간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도 왕복 주행하는 자동차를 모두 합쳐서 스무 대도 채 보지 못했다. 평양 시내에서는 대규모 공사장은 거의 볼 수 없었으며, 간혹 보이는 작은 공사 현장에도 현대적인 건설 장비를 보기 힘들었다. 손과 육신의 힘으로 거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평양 시내에는 웅장한 건축물도 적지 않았지만 모두가 1990년대 이전에 지어진 것들이었다. 농사짓는 마을에도 가 보았지만 역시 번듯한 농기계를 보기 어려웠다. 그동안 북한 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 때 무너져 내린 경제 인프라가 지금 북한 경제의 회생에 얼마나 심각한 걸림돌이 되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나 보였다.

순안공항 안의 면세점이나 필자가 묵었던 호텔의 매장, 그리고 북측 안내원이 데려다 준 판매점에도 살만한 물건을 찾기가 힘들었다. 호텔 내 옷 매장에는 대부분 일본과 중국에서 만든 옷들이었다. 뭔가 사 주고 싶어도 살 만한 물건이 별로 없으니 딱한 노릇이었다. 서점에도 책들이 너무 적었다. 종이가 워낙 귀해 아이들 교과서 지질도 필자가 1960년대에 쓰던 것보다 못해 보일 정도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토록 힘들어 보이는 북녘 땅에서도 희망의 싹은 자라고 있었다. 먼저 북한 주민들의 의지가 대단해 보였다. 역시 묘향산을 다녀올 때였으니까 18일 오후였다. 돌아오는 평양-향산 간 고속도로 상에서 우리는 엄청난 비를 만났다. 홍수 피해가 걱정될 정도의 폭우였다.

필자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창 넘어 들판에서 일하는 주민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센 폭우에도 주민들은 비를 피하지 않은 채 일하고 있었다. 주민들과 학생들이 폭우를 그대로 맞으며 가던 길을 그대로 걷는 모습도 자주 목격됐다. 북측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극한의 굶주림과 싸웠던 ꡐ고난의 행군ꡑ시대를 거치면서 북한 주민들은 더욱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아와 체제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주민들의 의지가 눈물겹게 대단해 보였다.

어둡고 지쳐 보이는 주민들 사이로 간간이 만나게 되는 밝은 옷차림의 젊은 여성들과 귀여운 아기들은 북한 사회의 또 하나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뜸한 일이긴 하지만, 단정한 옷차림에 뾰족구두 신고 걷는 젊은 여성을 보게 되면 왠지 반가웠다. 빨간색 꼬까옷 차려입고 엄마 손에 이끌려 종종걸음 걷는 어린아이를 멀리서나마 보게 되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직은 일부 계층이겠지만 형편이 조금씩은 낳아지고 있다는 사실, 사회의 다양성의 폭이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 사람들의 자기표현이 조심스럽게 살아나고 있다는 사실, 극도로 어려웠을 때와 비교해서는 그래도 많이 밝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해석해 보면서, 희망의 싹을 읽어본다.

빠르게 변화하는 북한 사회...“대구도 한민족 민간교류에 적극 나서야”

필자가 만난 북한 사회의 지도자급 인사들에게서도 매우 열린 자세를 엿볼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직접 만나본 지도자들이 몇 되지 않지만, 그들은 생각보다 경직되어 있지도 닫혀 있지도 않았다. 필자로서도 첫 방북이어서 과거와 비교할 수는 없지만, 그동안 들어온 바대로라면 상당히 유연해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그들은 남한 사회에 대해서 적대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자존심강한 그들도 북한의 식량 위기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남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했다. 식량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도 매우 진지하고 열성적이었다. 자신들의 어려운 형편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 주면서 이렇게 저렇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그들은 매우 솔직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북한의 위기가 주민과 지도부의 의지나 열정만으로 해결될 사안이 아니라고 한다면, 제도 개혁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이번 방북을 통해 필자는 그런 변화와 그 안에 담긴 희망도 읽을 수 있었다. 대표적인 예는 호텔 안 로비 중 일부 공간을 임시 칸막이로 꾸며 매장을 설치한 데서 찾을 수 있었다. 물건들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들은 외화를 벌어들이는데 적극적이었다.

평양 시내 번화가에서도 이런저런 물건들을 내놓고 파는 개인 매대(일종의 포장마차)를 볼 수 있었다. 살림집 뒷켠의 텃밭을 일궈 수확물을 개인 소유로 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한다. 직접 구경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시장도 생겼다고 한다. 매장 판매원이 물건을 많이 팔면 인센티브를 취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 매우 열성적으로 물건을 팔려고 애쓴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시장 시스템과 경쟁 원리가 빠르게 도입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 해방 후의 토지개혁조치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받는 2002년 7월 1일의 ꡐ경제관리 개선조치ꡑ 이후, 북한사회는 빠르게 자본주의와 시장과 인센티브 등을 제도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짧은 방북을 통해 필자가 내린 중요한 결론 중의 하나는 북한이 지금 매우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빈곤에서 탈출하려고 애쓰는 모습, 그러기 위해 기꺼이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였다. 사람들의 마음과 자세와 제도가 함께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그들을 보는 남쪽의 눈이 변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북쪽에서도 굶는 아이가 없도록, 미래의 통일 한국이 연대와 형제애 위에서 함께 번영해 갈 수 있도록, 이제 남쪽이 달라져 가는 북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었다.
또한 그들의 변화를 소리나지 않게 뒤에서 지원해 주는 세심한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ꡐ변화하고 있는 북한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바로 보자ꡑ고 말하는 것, ꡐ최소한 어린 아이들만이라도 굶지 않을 수 있도록 세심하게 신경 쓰고 지원하자ꡑ고 호소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다른 이들보다 한 발 앞서 평양을 다녀온 필자에게 주어진 엄중한 숙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울러 이번 대구 인사들의 방북이, 그러한 민족적 과제까지도 서울 중심으로 추진되어 온 그간의 남북교류 방식에서 탈피해, 우리 대구가 한민족 민간교류사업에 적극 나서게 되는 중요한 역사적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보았다. 한반도 문제를 푸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는 지역이 21세기 한국의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계속 뒤쳐져 가고 있는 우리 대구를 위해서도 매우 의미 있는 실천이 될 것이다. 이번 대구사람들의 3박 4일 방북이, 대구와 한국과 북한과 한민족이 모두 함께 번영하는 미래를, 나아가 우리 민족이 세계평화 구축에 적극 기여하는 역사를 우리 대구가 개척해 가는 출발이었기를 다시 한번 소망해 본다.

홍덕률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