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 말벗, 제게는 행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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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진골목 <미도다방> 정순조(56)씨..."할아버지 깊고 살가운 사랑 잊을 수 없어.."

'할아버지들의 연인', 미도다방 여사장 정순조(56)씨...26년째 다방을 운영하는 정씨는 어르신에게 말벗이 돼 주고 있다(2009.5.21. 대구시 중구 미도다방 / 사진.남승렬 기자)
'할아버지들의 연인', 미도다방 여사장 정순조(56)씨...26년째 다방을 운영하는 정씨는 어르신에게 말벗이 돼 주고 있다(2009.5.21. 대구시 중구 미도다방 / 사진.남승렬 기자)

"어린 시절, 할아버지께서 주신 한없이 깊고 살가운 사랑을 잊을 수 없어요. 그 사랑으로 제가 어르신들을 참 많이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단아한 한복을 입은 중년의 그녀. 이 말을 하고 소녀같이 수줍게 웃었다. "옛 것, 오래된 것의 깊이와 멋이 우러나오는 어르신들의 이야기가 참 좋다"는 그녀는 대구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다방 '미도'(美都)를 30년 가까이 꾸려오고 있다. 노인들의 말벗이 돼 주는 그녀를 두고 주변에서는 할아버지의 '연인'(戀人)이라 부른다.

대구 '진골목' 미도다방

대구 미도다방의 여사장 정순조(56)씨. 대체 어떠한 사랑이길래 연인이라고까지 불릴까. 그 사랑과 '아름다운 도읍'이란 뜻을 가진 다방 미도가 궁금했다. 반가운 단비가 내린 5월 21일 오후 정씨를 만나기 위해 미도다방을 찾았다. 미도다방은 대구역에서 중앙로를 따라 가다보면 중앙시네마 자리 우측으로 나있는 '진골목'(중구 종로2가)에 자리잡고 있다.

진골목 일대는 일제강점기 당시 대구 최고의 부자였던 서병국을 비롯한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살며 대구의 부자동네로 이름이 높았다. 또, 여성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1907년 2월 대구금연대회에서 남자들이 나라 빚을 갚기 위해 금연을 결의하자, 이 골목에 살던 부인 7명도 패물을 바쳤고 패물 헌납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대구 중구 '진골목'...오가는 사람 별로 없어 한적한 골목은 세월의 정취가 풍겨진다(사진.남승렬 기자)
대구 중구 '진골목'...오가는 사람 별로 없어 한적한 골목은 세월의 정취가 풍겨진다(사진.남승렬 기자)

미도다방이 있는 진골목은 옛 향기를 고스란히 머금고 있는 듯 했다. 지나는 이들은 거의 없었으나 정소아과의원을 비롯한 옛 건물과 가게들은 오랜 세월 동안 쌓은 고유의 정취를 풍겼다. 인근의 동성로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이 골목을 조금 벗어나자 오래된 건물과 만났다. 이 건물 2층이 미도.

덩그러니 미도다방이라고 적힌 간판은 젊은 취향의 동성로 카페 간판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가게 찾기 어렵지 않으셨어요. 젊은 사람은 이런 분위기 익숙하지 않을텐데(웃음)..."

산수유차를 내오며 정순조씨가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미도는 예전 시골 '사랑방'과 같은 정겨운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70~80대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탁자에 앉아 이야기를 풀어낸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듯한 할아버지가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이야기 하자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그래, 그 땐 다 그랬지. 그래도 자네 고향에 도청이 옮겨간다고 하니 좋으시겠어"하며 말을 받는다.

정씨는 "할아버지들이 말씀하시는 당신들 젊은 시절 이야기, 문중 이야기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 없다"며 "옛 것, 오래된 것의 깊이와 멋이 우러나오는 말씀을 하시는 어르신들의 말벗이 돼 주는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어르신들이 부담 없이 이 곳을 찾아 담소를 나누시는 모습을 보면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면서 "옛날 다방의 모습을 좋아하시는 그 분들을 위해 일부러 리모델링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어르신을 위한 다방을 꾸린 이유에 대해 묻자, 정씨는 친할아버지 이야기부터 꺼냈다. 청도 풍각에서 7남매의 장녀로 태어난 정씨에게 할어버지의 사랑은 각별했다. 정씨는 '한없는 사랑'이었다고 표현했다.

"할아버지께 받은 사랑 다 갚아야지요"

"저를 얼마나 귀여워 하셨는지 몰라요. 어린 시절 받았던 그 한없던 살가운 사랑을 제가 어떻게 잊겠어요. 제가 할아버지로부터 받았던 그 사랑이 제가 미도를 차린 이유지요. 할아버지께 받았던 사랑, 다 갚아야지요"

할아버지로부터 받은 사랑으로 어르신들을 공경하게 됐다는 정씨는 1982년 지금의 중앙치안센터 맞은 편 부근에 '도가니'라는 이름의 다방을 차렸다. 이듬해인 1983년 가게 이름을 미도다방으로 바뀌고 1991년 지금의 진골목으로 옮겨 26년째 미도를 운영해 오고 있다.

정씨는 "도가니 시절에는 손님 대부분이 학생이었다"며 "어르신들이 많이 찾지 않아 속상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다방 이름이 두 개였어요. 하나는 도가니, 다른 하나는 '밀턴포토'. 그런데 가게 이름이 어른들 정서에 맞지 않았는지 대학생 손님만 오는 거에요. 동생 같은 학생들에게 돈 받기도 미안하고. 무엇보다 어르신들을 위한 다방을 차리고 싶었는데, 고민이었죠. 결국 미도로 이름을 바꾸고 텐테이블이며 뮤직박스도 다 뜯어내고 어르신들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게 실내 분위기를 바꿨죠. 그 때부터 어르신들이 많이 찾았어요. 호호"

대구 근대다방의 명맥...아루스다방 → 동문다실 → 미도다방

미도다방은 대구 근대다방의 명맥을 잇는 명물로 입소문을 탔다. 대구 근대다방의 시작은 대구 출신의 화가 이인성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인성은 1936년쯤 지금의 중구 아카데미 극장 옆에 대구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아루스다방'을 연다. 대구 처음의 근대다방이었다. 이후 1950년대 여류 수필가 이화진이 이인성의 명맥을 이어받아 '동문다실'을 열었다. 당시 다방은 시 낭송과 토론이 펼쳐지고 출판기념회 등이 열려 낭만적인 분위기가 풍기는 문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다.

미도, '아름다운 도읍'..."가게 이름이 너무 예뻐서.."

정씨는 "미도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이인성 화가의 다방을 이화진 선생이 이어받아 미도라고 이름을 바꿨다는 글을 책에서 본 적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다"며 "도가니 다방을 운영할 때 근처에 미도화방이란 화실이 있었는데 이름과 뜻이 너무 예뻐 가게 이름을 미도라고 지었다"고 말했다. "아름다운 도읍이란 뜻인데, 개인적으로는 어르신들의 아름다운 도읍이라고 의미 짓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 때 11명이던 종업원은 현재 3명으로 줄었지만 요즘도 미도다방에는 하루 평균 300~400여명의 손님이 찾는다. 외환위기가 오기 전에는 하루에 2천여명이 찾았던 시절도 있었단다. 입소문이 나 안동과 영천을 비롯한 경북은 물론 멀리 서울에서도 찾아오는 손님도 있다고 한다. 정씨는 "다녀간 손님 중에는 이름만 대면 우리나라 사람 누구나 아는 분들도 몇 명 계셨다(웃음)"고 전했다.

미도다방 실내...벽면에는 정씨와 미도다방을 소재로 한  문인들의 작품이 빼곡하다
미도다방 실내...벽면에는 정씨와 미도다방을 소재로 한  문인들의 작품이 빼곡하다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팔며"...문인들의 작품 소재가 된 '미도'


특히, 시인과 수필가, 서예가를 비롯한 문인들이 많이 찾았다. 이들은 정씨와 미도다방을 소재로 숱한 시(詩)와 작품을 남기고 이를 다방에 기증했다. 다방 카운터 옆 벽면에는 서예가 율산 이홍재 선생이 선물한 '아름다운 도읍의 차 향기'란 내용을 담은 현판 '美都茶香'(미도다향)이 걸려있었다. 대구문인협회장을 지낸 고(故) 전상렬 시인은 '미도다방'을 시로 표현했다. 시는 "가슴에 훈장을 단 노인들이 저마다의 보따리를 풀어놓고 차 한잔 값의 추억을 팔며..."라고 노래했다.

또, 수필가 소범 김병시 선생은 '미도모정'을 주제로 이 다방을 노래했다. "드넓구나 미도의 품 아련하다 엄마 숨결. 다잔마다 정이 고여 삶의 향기 그윽하다. 해 저문 바쁜 길손들 들며 날며 취한다네"

이외에도 대한민국서예대전 심사위원을 지낸 동애 소효영 선생의 작품과 성주문화원장 거암 배춘석 선생의 반야심경 붓글씨, 정씨를 소재로 한 소범 박재희 선생의 탁명시, 죽농 서동균 선생의 대나무그림을 비롯한 수십 점의 작품이 미도다방 곳곳을 장식하고 있다. 정씨는 "훌륭한 작품을 선물하신 선생님들과 단골 어르신들이 돌아가셨을 때가 가장 슬펐다"고 말했다.

커피 한 잔 값 1500원과 미도봉사회

정씨는 봉사활동에도 애를 쓰고 있다. 20여년 전부터 매년 어버이날 마다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게 떡과 돼지고기, 다과를 무료로 대접해 주고 있다. 할아버지들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해 수년째 커피 값은 한 잔에 1500원만 받는다.

특히, 지난 2001년 '미도봉사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해마다 지역의 소년소녀가장 3명에게 각각 12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한편, 홀몸어르신 7명에게 연간 60만원씩 성금을 전달해 오고 있다. 미도봉사회를 만든 것도 손님 덕이었다.

"8년 전에 가게 단골이던 한 야당 정치인이 '좋은 일 한번 해보자'며 봉사단체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처음엔 5명으로 시작한 단체가 지금은 회원 수가 120명이 넘어요. 회원 대부분 가게 단골 손님인 70~80대 어르신들이죠. 함께 양로원과 교도소를 찾아 성금도 전달하고... 봉사활동을 하시는 어르신들 모습에서 제가 오히려 더 많이 배우고 있어요"

이 같은 선행이 인정받아 정씨는 오는 30일 시민운동장에서 열리는 '대구경북 시도민 육상대회 중구 예선전' 행사에서 '자랑스러운 중구 구민상'(선행부문)을 받는다.


어르신들과 나누는 이야기에 깃든 깊고 은은한 사랑

"작가 이름은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데 왜 '낙엽을 태우며'란 수필 있잖아요. 낙엽 타는 냄새가 갓 볶아 낸 커피 향 같다던... 저도 한 땐 문학소녀였어요.(웃음) 좋아하는 커피 향 마음껏 맡을 수 있어 좋고, 어르신들과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지요. 제 행복이었고 앞으로도 이 행복이 계속되길 바라고 있어요"

"어르신들 말벗도, 봉사활동도 다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일 뿐"이라며 "여력이 되는 한 미도를 꾸려가면서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들어주고 싶다"는 정씨. 그녀에게서 미도다방의 차와 같은 깊고 은은한 사랑이 묻어난다.

어항 너머, 어르신들이 담소를 나누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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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산 이홍재 선생의 작품 '미도다향'...아름다운 도읍의 차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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