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외유내강, 신념 확고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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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J 인연> 재야원로 강창덕 선생..."고생한다 일일이 챙겨주던 19년 정치적 동지"


김대중 전 대통령 영전에 헌화하는 강창덕 선생...(2009.8.19 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 영전에 헌화하는 강창덕 선생...(2009.8.19 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대구 재야원로 강창덕(83) 선생은 '배려'와 '외유내강'이란 말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성품을 기억했다. 특히, "민족자주, 평화통일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 확고한 분"이라며 고인의 서거를 애도했다.

강창덕 선생은 민주화운동에 이은 '정치적 동지'로 김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

자유당 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하다 7차례 투옥돼 13년을 복역한 강창덕 선생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을 지낸 뒤 정치권에 참여하게 됐다. 강 선생은 1990년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이우정씨와 함께 '신민주연합'에 참여했는데, 1991년 김 전 대통령이 총재를 맡고 있던 평화민주당(평민당)과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을 창당하며 인연이 시작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이우정씨와 함께 신민당 공동대표를 맡았고, 강 선생은 통합전당대회 임시의장과 중앙위원회 의장(당 서열 3위)을 맡았다고 한다. "그 때부터 19년 동지로 지냈지..."

"김 전 대통령이 그 때 나를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만들고 싶다며 여러 번 얘기 했는데, 내가 인혁당 조작사건 때문에 할 수가 없었지. 그분의 배려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어". 강 선생은 1974년 이른 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모진 고문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8개월을 복역했다. 지난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인혁당 무죄'가 선고되면서 오랜 멍에를 벗었다.

강 선생이 기억하는 김 전 대통령의 성품은 '배려'와 '내유외강'이었다.
"동교동에서 밥반주도 한잔씩 하고 했는데, 회의 때나 식사 때나 항상 대구에서 고생한다며 배려해주셨어. 주위 사람들 일일이 챙겨주는...외유내강, 전형적인 외유내강 사람이었지"

"대구에서 재야운동 하던 시절이니 내가 돈이 없었어. 그런데 당비가 꽤 됐거든. 그때 현역 의원은 한달에 100만원, 원외 위원장은 한달 50만원이었는데, 김 전 대통령이 내 당비를 꼬박꼬박 부담해주셨지. 대구에서 재야 하는데 무슨 돈이 있겠냐며..."

그러나, 그 성품 못지 않게 '통일'에 대한 신념에 강 선생은 놀랐다고 한다.

"신민당 시절부터 남북문제 통일문제로 많은 토론을 했는데, 김 전 대통령은 3단계 통일론이었고 나는 민족자주통일론을 주장했지. 생각이 좀 달랐는데, 6.15선언 때 평양에서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을 강조하는 걸 보고 참 놀랐지. 민족자주, 평화통일에 대한 철학이 확고한 분이셨어. 그 철학이 6.15선언 때 발휘된거야. 정말 신념이 대단한 사람이야"

강 선생은 김 전 대통령 취임식 때 초청받아 참석했고, 재임시절 대구에 왔을 때 한번 만났다고 했다. 그리고 퇴임 후 보지 못하다 2006년 3월, 김 전 대통령이 영남대에서 명예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고 강연할 때 인사했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강 선생은 <대한민국 15대 김대중 대통령 대구시민추모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19일 추모위원회 합동분향 때 고인의 영정에 국화 꽃 한 송이를 놓았다.

김대중 전 대통령 영전에 분향하는 강창덕 선생...(2009.8.19 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김대중 전 대통령 영전에 분향하는 강창덕 선생...(2009.8.19 대구2.28공원 / 사진.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1927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강창덕 선생은 건국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56년 영남일보 공채 1기로 입사에 정치부 기자로 사회 첫발을 내딛었고 2년 뒤 58년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겼다. 그러나, 1960년 사회당 경북도당 선전.조직위원장을 시작으로, 67년 '반독재 재야민주세력단일후보 추진위원회' 활동과 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구경북상임공동의장, 93년 경산민우회 초대회장을 지내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선생은 이같은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무려 7차례 투옥돼 13년을 복역했다.

일제시대 말기에는 1944년(17살) 친구들에게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군 활동을 얘기했다 '반일사상 고취' 혐의로 구속됐고 45년에는 일본해군지원병 입대를 피해 도피하다 붙잡혀 구속되기도 했다.

선생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됐다. 47년 학생웅변대회에서 '남조선 단독선거'를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미군정 포고령위반'으로 구속됐고, 52년에는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 서상일 후보(초대 국회의원) 선거운동 과정에서 '무력통일 반대, 평화통일'을 선거운동원들에게 주장하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4번째 구속됐다. 또, 61년에는 '반공법 제정 반대' 집회와 '남북학생회담 촉진 시민궐기대회' 연설로 두차례나 구속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이른 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구속돼 모진 고문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82년 형집행정지로 출소할 때까지 8년8개월을 복역했다. 그러나, 지난 2006년 국무총리실 소속 '민주화운동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민주화운동관련자'로 인정받았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방법원 재심에서 '인혁당 무죄'가 선고되면서 오랜 멍에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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