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에서 인권.민주화 힘쓴 어느 외국인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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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앰네스티 한국지부장 '허창수' 신부 선종..."나는 한국에서 행복했습니다"


 "신부님, 그냥 신부님으로만 조용히 계셔주세요"
 "내가 길을 가다 한국 사람이 다쳐 쓰려져 있어도 내가 외국인이기에 그냥 지나쳐야 합니까"


고 허창수 신부(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고 허창수 신부(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허창수 신부는 '나서지 말아달라'는 경찰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부하며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80년대 군사정권에 맞서 데모하던 대학생들을 성당 안으로 숨겨주기도 했다.

국제엠네스티 한국지부장을 맡아 한국인의 '인권'에 힘썼고, 한국 노동자의 벗으로 살며 그들의 권리 신장을 위해 20년 가까이 해마다 독일을 방문해 경제윤리세나를 열기도 했다.

파킨슨씨 병을 앓으면서도 늘 유머로 웃음을 잃지 않고 주위 사람들을 아껴주던 독일 출신의 신부. 자신에게 무례한 사람까지 늘 용서하는 삶으로 사랑을 베푼 사제.

 한국에서 한국인을 위해...모국에서 영면

허창수 신부는 "나는 한국에서 행복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선생님께서 서 계신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생각하고 실천해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고 당부했다고 지인들이 전했다.

낯선 이국에서 인권.민주화운동에 힘쓴 허창수 신부(독일명 헤르베르트 보타와)가 선종했다.

고 허창수 신부는 지난 8월 26일 고국인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산책을 하다 심장마비로 숨졌다고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가 전했다. 20년 가까이 '파킨슨'병을 앓아온 고인은 지난 6월 한국의 지인들과 경제윤리세미나 참석차 독일을 방문했다 다음 주 귀국을 앞두고 모국에서 영면했다. 고인의 빈소는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와 성베네딕도왜관수도원에 마련됐으며, 장례미사는 30일과 9월 1일 문화센터와 수도원에서 각각 거행된다.

KNCC '인권상'...국가인권위 '대한민국 인권상'

미사를 집전하는 허창수 신부(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미사를 집전하는 허창수 신부(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1941년 독일에서 태어난 고 허창수 신부는, 이탈리아 로마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뮌헨대학 신학과(철학박사)에 다니던 1968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유신헌법이 공포되던 1972년 10월 한국에 들어와 성주성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안동성당 주임신부,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을 거쳐 지난 1985년부터 구미가톨릭근로자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특히, 1975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이사(-86), 조정위원회 위원장(89-91)에 이어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초대 한국지부장을 지내며 국내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이 공로로 1995년 <한국기독교협의회(KNCC)대구인권위원회> 1회 인권상을, 2005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민국 인권상을 받았다. 또, 구미경실련 공동대표(1995-2004)와 경실련 공동대표(2003-04)를 맡아 시민운동에 큰 힘을 보탰다.


고인에게 '제1회 인권상'을 수여한 KNCC대구인권위원회는 29일 애도 성명을 내고 "20년간 파킨슨병을 앓아 손이 떨리고 그 유창한 국말도 어눌해졌지만, 기쁘게 상패를 받아들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며 "그가 평생토록 헌신했던 대구지역을 잊지 못할 것이고 우리 또한 허 신부님을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라고 추모했다.

용서하는 삶..."나는 한국에서 행복했습니다"

고인이 마지막으로 '소장'을 맡고 있던 구미가톨릭근로자회관 직원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한 직원은 "신부님처럼 훌륭하신 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몸이 불편하신데도 개의치 않고 노동자들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신 분"으로 기억했다. 또, "유머가 많으시고 직원들을 정말 아껴주신 분"이라며 "표현 하기 힘든 정말 훌륭하신 분"이라고 애도했다. "신부님은 무례한 사람,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들까지 늘 용서하시는 삶을 사셨다"며 "나는 한국에서 행복했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하셨다고 전했다. “저는 신부님에 대해 말할 자격도 없다”며 이 직원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모경순 사무처장도 "파킨슨씨 병으로 늘 약을 먹고 잠도 잘 못주무시며 오래 고생하시면서도, 늘 즐겁게 이기시고 아주 힘든 상황에서 유머를 잘 하신 분"이라고 고인을 기억했다. “신부님은 한국의 노사 관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셨고, 독일의 사회적 경제 제도가 한국사회에 안정적인 노동자 권리 보장에 도움이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전했다.

"대구의 해방구 만드신 분"

고 허창수 신부는 1985년부터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을 맡아왔다(미사 중 영성체 모습 / 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고 허창수 신부는 1985년부터 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소장을 맡아왔다(미사 중 영성체 모습 / 사진.구미가톨릭근로자문화센터)

민주화.인권, 노동자 권리에 힘쓴 고 허창수 신부.

고 허창수 신부는 80년대 대구 대명성당 안에 있던 대구가톨릭신학원 원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당시 허 신부는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을 성당 안으로 많이 숨겨줬다고 한다. 물론, 허 신부 역시 민주화운동에 힘을 쏟을 때였다.

고인은 경찰이 찾아와 "신부님, 그냥 신부로만 조용히 계셔주세요"라고 부탁하자, "내가 길을 가다 한국 사람이 다쳐 쓰려져 있다면 내가 외국인이기에 그냥 지나쳐야 하는가"라고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KNCC대구인권위원회도 당시 상황을 기억하며 "대구  대명성당을 서울 명동성당처럼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만들기도 했던 분"이라고 애도했다.

"서 계신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고인은 또, 한국의 '노동자 인권'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지난 90년대 초부터 한국의 지인들과 해마다 독일을 방문해 20년 가까이 '경제윤리세미나'를 이끌어왔다. "신부님은 한국의 노사 관계에 특별한 애정을 가지셨고, 독일의 사회적 경제 제도가 한국사회에 안정적인 노동자 권리 보장에 도움이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구미가톨릭근로센터 모윤숙 사무처장이 전했다.

고인과 함께 경제윤리세미나를 해 온 김재경 박사(사회학)는 "몸과 정신이 약해지시면서도 혼신을 다해 추진하셨다"며 "신부님은 함께 해 주신 분들이 서 계신 자리에서 조금씩이라도 생각하고 실천해주시면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지인들에게 이메일을 통해 고인의 뜻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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