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소소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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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가녀린 감성 같았던, 정호승을 다시 읽으며"


가을이 되면 환장할 것 같았다.
눈이 멀 듯한 단풍은 언제나 형체없는 그리움을 불러왔다. 따갑게 부서지는 가을햇살이나 청명하게 높아진 하늘이나 애처로운 풀벌레소리들은 뭔가 빈 가슴을 ‘솨아~’ 하고 훑고 지나가는 바람 같았다. 가을이 오면 떠나야 했다. 내 가슴의 바람이 나를 못살게 굴었다.

헌데, 올해 가을은 나를 들뜨게 만들지 못했다.
멀리 떠나는 친구를 바래면서도, 그와 나 사이에 놓인 실제적 거리가 우리 우정을 말리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를 잃고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 친구에게 “울 수 있는 만큼 울어라.”는 여유를 부렸다. 애인과 헤어져 위로받고 싶다는 후배의 넋두리를 밤새 들어주었다, 아무런 말없이.

놀라울만큼 나는 고요해져 있었다. 떠나가는 것보다 내 안에 깃든 충만함이 나를 평온하게 감싸 준 덕분이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이 세상 모든 것들에는 스스로 이겨내는 생명력이 있다는 걸 눈부시게 깨닫는다. 그것을 지켜볼 수 있는 시간들이 고맙게 여겨진다.

마을 도서관에 앉아 영화잡지를 뒤적이다가 문득, 커다란 유리벽 너머 도시를 내려다본다. 한 눈에 다 담기는 앞산의 산그늘을 또 한참 쳐다본다. 새 책 진열장에서 신간의 제목만 훑어보거나 어린이 서가에 가서 그림책을 오래 들여다본다. 그림이 곁들여진 잘 쓴 동시는 우리말의 진수이다.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햇살을 쬐면서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눈다. 책읽은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좋은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만족감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몇 권의 책을 빌려 집으로 오는 동안 단풍이 짙어가는 가로수와 거기 스러지는 햇살을 본다. ‘가을의 절정이구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소소하기 그지없는 일상의 행복감이 밀려온다.

집에 오니 주문한 음반 한 장이 도착해있다.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 정호승 시에 바치는 안치환의 노래들. 반복해서 듣고 또 듣는 사이, 무릎을 친다. 한때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지식인의 가녀린 감성’이라 치부했던 그의 시 구절에 이토록 깊은 의미가 담겨있었다니!

다시 정호승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정호승과 함께 이 가을을 보낼 수 있다는 것, 즐겁고 행복한 나의 시간에 또 감사하면서.

맹인부부가수
* 정호승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은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 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 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주말에세이] 이은정

이은정 / 달성군 화원읍에 사는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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