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말하는 예수, 반말하는 사제

호인수
  • 입력 2009.12.23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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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인수 칼럼]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린 교회"


 
2005년 출간된 <성경> (사진/한상봉)
2005년 출간된 <성경> (사진/한상봉)

읽기, 듣기가 다 민망하고 거슬리는 걸 오래도 참고 견뎌왔다. 다름 아닌 하느님의 말씀, 성경 이야기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자.

미사 때마다 지난 2005년 3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펴낸 <성경>을 봉독하면서 느끼는 감정은 한 마디로 “이건 아니다!”이다. 시도 때도 없이 해대는 예수의 ‘반말지거리’가 그 이유다. 어려운 번역작업에 종사한 분들의 노고를 십분 감안하더라도 이해가 안 된다. 서양말엔 존댓말 반말이 따로 없으니 별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우리말은 그게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어쩌자고 2005년 <성경>은 예수를 이렇게까지 아무한테나 반말하는 버릇없는 사내로 격하시켜 놓았을까?

1971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신구교 <공동번역 신약성서>(대한성서공회 발행)가 나왔을 때는 안 그랬다. 예수를 포함한 성서 속의 인물들은 모두 깍듯이 존대를 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6년 후에 구약을 합쳐서 나온 <공동번역 성서>는 예수의 존댓말을 모조리 반말로 고쳐 쓴다. 그런 와중에 1991년에 분도출판사에서 <200주년 신약성서> 보급판이, 1998년에는 개정보급판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예수는 “오랜만에”(1977년 이후) 누구에게나 공대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런데도 교회는 줄곧 모든 전례 안에서 <200주년 신약성서>를 제쳐두고 예수가 반말하는 <공동번역 성서>를 사용하다가 지난 2005년 주교회의 춘계정기총회에서 새 <성경>을 한국교회 공용으로 내놓게 된다.

직접 성서의 한 구절(요한 18,33~34)을 비교해보자. 로마제국의 식민지, 유다의 최고 권력자인 총독 빌라도와 그 앞에 끌려온 갈릴래아 시골청년 예수와의 법정 심문 내용이다.

빌라도 : 당신이 유대인의 왕이요?
예수 : 그 말이 당신 생각에서 나온 것입니까? (1971년 공동번역 신약성서)

빌라도 : 네가 유다인의 왕인가?
예수 : 그것은 네 말이냐? (1977년 공동번역 성서)

빌라도 : 당신이 유대인 왕이요?
예수 : 스스로 하는 말입니까? (1998년 200주년 신약성서)

빌라도 : 당신이 유다인들의 임금이요?
예수 : 그것은 네 생각으로 하는 말이냐? (2005년 성경)


‘공동번역’에서는 그나마 재판장과 피고인이 서로 반말을 하는데 새로 나온 ‘성경’은 재판장 은 정중하게 존댓말을 하고 피고인은 뻣뻣하게 반말하는 사람으로 그린다. 이런 일이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새 성경이 나왔을 때, 나는 번역에 종사했던 분의 해명을 들은 적이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권위를 부각시키기 위한 충정이었다는 것. 납득이 안 간다.

“오늘 예수가 제대로 이해되지 못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은 교회가 인간 예수의 삶을 교리 속에 묻어 버렸기 때문인데, 반말하는 예수는 교회의 그런 의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예수전’의 작가 김규항씨의 주장에 동의한다. 예수의 반말이야말로 권위의 상징이라고 믿는 이들이 새 ‘성경’에서 예수를 왜곡되게 이해하도록 만든 장본인이라면 그들의 사고는 애 어른 할 것 없이 모든 본당교우들에게 반말하는 일부 사제들의 권위주의적인 태도와도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터다.

그나마 공동번역으로부터 지금까지 나온 모든 새 번역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의 작업이 결코 완벽한 것이 아니니 앞으로 더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도록 다양한 비판과 의견제시를 바란다고 했다. 다행스런 일이다.

 
 






호인수
/ 신부. 천주교 인천교구 고강동성당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 2009년 12월 23일 ( 지금여기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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