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꿈꾼 세상은 모두에게 할 일을 주고, 일한 대가로 먹고 입고, 누구나 다 자식을 공부시키며 이웃을 사랑하는 세계였다. 그 세계의 지배계층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아버지는 말했었다. 인간이 갖는 고통에 대해 그들도 알 권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곳에서는 아무도 호화로운 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p.36 조세희]
운동이란 사회를 변화시키는 목표를 갖는다. 그래서 운동은 운동가에게 가슴 설레는 위대한 일이기도 하고 때로는 운동이 운동가에게 넘어서기 힘든 고통을 감내할 것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운동가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체로서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몸을 던진다. 그런데 권력과 폭력에 의하여 ‘운동의 대상으로써의 사회’가 참담히 무너지는 현실을 묵도하였다면 운동가는 어떻게 해야만 하는 것일까?
2009년 1월 20일 이후 용산4구역은 나에게 그런 곳이었다.
국민의 행복과 생명을 지켜야 할 정부는 살기 위해 망루에 올라간 용산철거 세입자를 폭력과 공권력으로 살인진압을 자행하였다. 그 추악하고 충격적인 용산4구역 살인진압 사건에 정부는 근원적인 반성과 성찰은 고사하고 망루농성 철거민들을 불에 태워 죽인 그 현장에서 다시 포클레인을 들이대고 철거에 열을 올리고, 그 용역깡패를 비호하는 경찰의 모습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도대체 사람이 5명이나 죽어간 이런 일을 겪고도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는 것, 눈보라 휘몰아치던 그 겨울을 넘어 꽃 피고 지던 봄도 지나 여름 그리고 또 다시 눈보라 휘몰아치는 겨울까지 용산철거민과 유가족은 남일당 현장으로 청와대로, 검찰청으로 자그마한 해결의 실마리도 찾기 위해 애태워 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폭력뿐이었다.
용산철거 세입자들의 참담한 죽음에 대하여 국가의 책임과 의무는 스스로 공명되지 않고 건설자본의 마름이 되어 그들이 이야기하는 자본독재의 법과 원칙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국가권력의 속성과 자본독재라는 돈 세상으로 돌아가는 세상 이치를 이렇게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기막힌 사건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용산4구역은 ‘운동가의 운동’이 도대체 어디에 발을 딛어야 할 곳인지 다시 되묻고 있다.
용산4구역은 또한 제대로 된 인권의 길을 되묻고 있다.
주거권으로 시작된 사회권 전반의 파괴가 강제철거와 나아가 일상적인 폭력의 문제를 비켜서서는 사고할 수 없다. 그래서 폭력에 의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시민의 자유권 전반의 부정이 강제철거다. 이런 것들은 이익을 최대한 내려는 건설자본과 그에 기생하는 재개발조합 집행부들, 철거용역업체, 그리고 경찰과 시와 구청, 입법부, 사법부 등의 관계가 그곳에 하나로 얽혀 돌아간다. 철거민들의 내부로 들어가서 보면 가옥주와 세입자, 상가 주인과 세입자의 관계가 또 다르다.
이렇게 얽힌 관계망 속에서 인권적 관점은 늘 가장 약자의 위치에 설 수 밖에 없는 세입자의 입장에 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철거지역에서 세입자들은 건설자본, 조합, 용역, 가옥주(때로는 같은 편일 수 있지만)와 같은 사적권력과 이들의 편을 드는 경찰, 관청, 입법부, 사법부, 국가권력과 같은 공적권력을 상대로 싸워야 자신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게 된다. 이토록 심각한 힘의 불균형 속에 놓인 세입자들은 대체로 초기에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을 포기하고, 자신의 집이 부서지는 모습을 보면서 그 동네를 등지게 된다.
그러면서 경찰, 관청, 입법부, 사법부, 국가권력 철저히 재산권은 옹호의 대상이 된다. 모든 권력과 제도는 이 재산권을 옹호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의 이해에 맞추어 거침없이 재산권의 인권을 주장한다. 인권을 재산권을 옹호하기 위한 장신구 이상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그래서 재산권을 침해하는 용산철거 세입자들은 재산권을 침해하였기에 중형을 처함이 마땅하다며 법과 제도를 들먹인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이야기하는 재산권을 인권에 범주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들이 이야기하는 인권을‘이권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허름한 집 한 칸, 권리금 내고 보증금 걸고 사글세로 운영하는 가게 한 칸이 그 가족의 목숨 줄이고, 생명줄일 때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파악될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인권이‘관계와 맥락 속에서 파악하는 인권’이란 관점을 놓지 말아야 한다. 때문에 용산4구역은 인권이 시계가 어디로 향하는지 묻고 있다.
이제 용산철거 세입자 장례식이 오는 9일에 엄수된다.
국무총리의 사과 그리고 유가족의 위로금, 용산 철거민 피해보상 등 지난 일 여 년간의 투쟁의 성과로 인한 타결이다. 타결 소식을 듣고서 유족들은 서로 껴안은 채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1년 가까이 끌어온 투쟁동안 쌓인 설움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것 일게다. 하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개발 정책 전환의 근원적인 처방이 없는 가운데 유족과 용산과 함께하였던 사회운동진영 그리고 가슴으로 아파하였던 국민들은 여전히 반쪽짜리 타결이라 모두의 마음이 무겁다.
반쪽짜리 타결, 하지만 돌아가신 용산철거 세입자 다섯 분을 보내드릴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남아 있는 과제 그리고 짊어져야 할 마음의 짐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자 오늘을 기꺼이 살아가야 하는 인권운동가의 부끄러운 가늠쇠가 되어 운동을 밀어가는 힘일 게다.
[기고]
서창호 / 인권운동연대 상임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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