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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짝 엿본 비문 '노동자와 몸부림치다 죽다'
장명숙 세실리아 ④ / 병원에서 다시 새긴 노동자의 형제애...
2010년 06월 02일 (수) 15:06:08 평화뉴스 pnnews@pn.or.kr

'이 사람이 죽다. 평생을 노동자와 더불어 살다가, 몸부림치다 죽다.'
 

지난 삶을 더듬으며 미리 새겨본 비문(碑文)입니다. 그는 직물공장 공원으로 출발해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에 몸담으면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노동자의 당당한 권리를 찾으려고 노동 형제들과 쉼 없이 몸부림 쳤습니다. 그는 또 지쳐 쓰러졌을 때 자신을 살려낸 사람은 노동자 동지들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돈도 집도 없이 그나마 가진 몸뚱이마저 만신창이가 되었을 때 그의 곁에는 노동자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횡격막(가로막), 심장, 담낭, 난소, 자궁…. 그의 몸속에는 온전히 성한 곳이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수차례의 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여러 종류의 약을 먹습니다. 특히 1978년 죽음과 삶의 갈림길에 섭니다. 결핵성 늑막염으로 알다 병을 키워 뒤늦게 횡격막의 신경을 살려내는 큰 수술을 부산국군통합병원에서 받습니다. 미국인인 전익환 신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삶을 한 번 쯤 정리하고 들어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당시 의사는 말합니다. 치료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에둘러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유서일지도 모를 편지를 몇몇 사람에게 썼습니다. 그 중의 편지 2통이 주소를 바꿔 적는 바람에 잘못 전달됩니다. 애틋한 사연을 담은 사랑의 편지가 안동교구장 두봉 신부에게 가고 만 것입니다. “너의 형편(?)을 알겠다.”는 알듯 모를 듯 한 답장이 왔습니다.

   
▲ 장명숙(세실리아)
그는 병원에서 다시 한 번 노동자의 진한 형제애를 새기게 됩니다. 그의 수술을 앞두고 부산의 노동자들이 나서게 됩니다. 정확히는 부산의 가톨릭청년회 회원들입니다. 20여명의 노동자들이 적십자 병원에 가서 헌혈을 한 뒤 그의 혈액형인 O형으로 바꿔 수혈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당시의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사흘이 멀다 하고 굶주렸을 노동자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것입니다.

그나마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납니다. 이듬해인 1979년 다시 대구가톨릭노동청년회로 복귀합니다. 이때부터 대구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통해 지역 노동운동, 특히 여성노동운동을 김영숙, 이태숙 등과 본격적으로 펼치게 됩니다. 이런 즈음에 그는 경북 영양 감자사건으로 유명한 가톨릭 안동농민회의 이른바 ‘오원춘 사건’과 맞닥뜨립니다.

당시 영양군에서는 농가소득 증대라는 구호아래 가을감자 ‘시마바라’를 심도록 권장합니다. 하지만 종자가 썩었거나 불량인 탓인지 재배농가의 80% 이상이 싹이 트지 않아 농사를 망치게 되자 농가는 끈질긴 보상을 요구합니다. 1979년 5월 5일 안동교구가 이 일에 앞장선 오원춘이 납치감금, 테러를 당했다고 밝히면서 불거진 사건입니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은 가톨릭농민회 활동에 불만이던 정부 및 농협의 갈등이 표출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때 경찰에 잡혀 구류처분을 받습니다. 거기에는 또 다른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애초 결혼에 마음을 두지 않았지만 막상 결혼을 하려고 하니 시부모의 반대가 만만찮았습니다. 아마도 노동운동을 하는 며느리를 맞는다는 게 탐탁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더구나 학벌 차이도 엄연한 현실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지요.

“노동자가 얼마나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는지 실감했습니다. 그 때 가톨릭노동운동을 통해 내 길을 굳혔습니다. ‘내가 살길은 이거다’고…” 그가 일찍이 가졌던  첫 마음입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 일 욕심을 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김진태 동료가 남편에게 참일꾼을 집에 놀리면 되느냐고 한소리 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다시 일터로 나오게 됐고 결혼에 반대했던 시어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듣습니다.
“너 같은 사람 있으면 이 세상 바뀐다.”

▪ 덧붙이는 말.
선거는 중독성 못지않게 전염성이 있다고들 그러지요. 그가 지난 1991년 민중당 후보로 시의원 선거에 나선 이야기를 했지요. 1996년 3월, 그는 신문을 보고 남편이 한 달 뒤의 4.11 국회의원 총선에 출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5년 전과는 달리 선거가 끝난 뒤 살던 집을 비워주어야 했습니다.

   



[박창원의 인(人) 13]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세 번째 연재입니다.
직물공장 여공에서 대구의 노동운동가로 살아 온 장명숙(세실리아)님의 이야기입니다.
장명숙님과 함께 활동하셨거나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421-6151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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