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아성에서 탈출하는 교회, 대구대교구

지금여기 한상봉 기자
  • 입력 2010.07.0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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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와 대구대교구, 박정희와 이효상 그늘에서 이젠 벗어나야..



한국사회 안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정치적 지형이 달라지고 있다. 개신교의 주류는 이명박 정부의 지지세력으로 자리매김하며 힘을 모으고 있으며, 일부 개신교인들과 불교, 가톨릭교회는 4대강 사업을 중심으로 현 정부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가톨릭교회의 특수지역으로 손꼽히고 있는 대구대교구의 변화를 바라보는 시선이 있다. 대구지역의 보수성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지적하는 것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권력유착의 역사다. 최근 이와 관련해 <기쁨과 희망>(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제5호에 실린 한상봉의 '한국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선택과 지역정치-대구대교구의 보수성을 중심으로'라는 글을 축약하며 대구대교구의 상황을 진단한다. 다소 길지만 독자의 관심을 기대한다.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자

 
대구 달성보에서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한 대구대교구 사제들(사진/한상봉 기자)
대구 달성보에서 생명평화 미사를 봉헌한 대구대교구 사제들(사진/한상봉 기자)

최근 대구대교구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 6월 22일에는 벌써 다섯번째로 정부의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대구생명평화미사'가 대구대교구 대현성당에서 봉헌되었고, 이 자리에 대구대교구 김영호(사목국장) 정홍규 신부 등 9명의 사제가 참여했다. 이들은 "강은 어머니의 품과 같다"며 "철없는 자식이 어머니 품을 파헤쳐 어머니를 욕되게 하고 있다"고 4대강 사업을 비판하고, 돈을 섬기는 물신주의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박정희 정권 이래로 대구대교구는 공화당, 민정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집권 보수여당에 대한 반대의 움직임이 없었으며, 그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고 부르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는 한사코 정부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이었다. 그런데 이번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기점으로 대구대교구가 예전의 타성에서 벗어나 새로운 교회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다.

대구, 이효상의 후예들의 도시

참언론대구시민연대 사무국장인 허미옥 씨가 대구를 '이효상의 후예들의 도시”라고 부른 것처럼, 천주교 대구대교구는 대구지역 보수성의 원천이 되고 있어서 그동안 줄곧 비판을 받아왔다. 이는 천주교 대구대교구에서 운영하는 <매일신문>이 대구의 '조선일보'라고 부를 만큼 문제가 많으며, 1980년 이후 대구지역 사람들에게 일방적인 정보를 흘리고 보수적 여론을 조성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임 교구장이었던 이문희 대주교의 아버지인 이효상 씨를 비롯해서 서정길 대주교와 전달출 신부 등으로 이어지는 권력유착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반공주의’과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혼전을 거듭하면서 성장해 왔다. 한국교회에서 반공(反共)은 언제나 상수(常數)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좌우대립과 분단상황은 이를 더욱 고착화시켜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소 변수(變數)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상수로 있었는데, 교황청은 일본제국주의와 뭇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과 더불어 방공(防共)협약을 맺은 바 있으며, 이는 해방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가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반공을 주장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그렇게 쉽게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는 또한 한국천주교회가 장면의 민주당 정권과 4.19혁명의 결과를 무산시키고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그렇게 쉽게 동조했던 까닭도 설명해 준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민주주의 보다 반공주의를 앞세워 왔다. 그리고 대구대교구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반공만을 상수로 선택한 유일한 그룹으로 남아 있다는 데 비극이 있다.

정의평화위원회 없는 권력유착 교회, 대구대교구

공교롭게도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1961년 6월 3일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단독인터뷰를 한 곳이 <(대구)매일신문>이었다. 당시 <매일신문> 서울분실에 주재하는 정경원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박정희는 자신이 대구 출신(정확히 경북 선산)이므로 고향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대구의 유력한 신문과 인터뷰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5.16쿠데타의 직접적 동기를 “장면정권이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팽개치고 무능과 부패로 일관해서 도저히 그들로서는 긴박한 위기를 타개할 힘이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다간 1년 후에는 공산주의가 시골 농촌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효상 전 국회의장
이효상 전 국회의장
이런 상황에서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가 교황청 대리감목구에서 정식 교구로 승인되면서, 대구교구의 서정길 주교는 3월 25일자로 대주교에 승품되었는데, 서정길 대주교는 <천주교회보> 편집장도 역임하고 <가톨릭청년>에 왕성한 기고활동을 벌였던 이효상에게 막바로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이는 당시 한국교회의 일반적 정서와는 다른 길이었다. 장면정권의 퇴각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정치적 태도를 정할 수 없었으며, 이후 한국교회의 지도부는 대체로 장면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김대중과 운명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대구교구가 한국천주교 주교단의 입장과 상관없이 한사코 군사정권의 편에만 서서 발언하게 된 배경이 된다. 대구는 보편교회의 입장을 떠나 ‘대구’라는 ‘지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에 몰입했다.

이효상은 줄곧 교직에 머물다 1960년에 무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8개월 만에 군사쿠데타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1962년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뒤로 박정희 정권과 한국천주교회, 특히 대구교구와 군사정권이 밀월관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에 교회가 일치단결해서 장면을 정계에 내보내고 그를 통해 교회의 지위상승을 꾀했듯이 대구교구는 이제 이효상을 그런 식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효상은 1963년 국회의장으로 피선된 뒤로 8년(6대, 7대)동안 의장직을 지켰으며, 1972년에는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요직에 있었다.

이효상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힘겹게 다투던 박정희 후보의 선거연설회에서 대구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사회를 맡아보면서 박정희에게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계파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국회의장이 되었다. ‘박정희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효상은 박정희 집권 전반부인 8년동안 국회의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기반을 마련한 1969년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박정희의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대구대교구 소속의 <가톨릭시보>는 이미 교구를 초월한 신문임을 표방했으면서도 상당 부분 대구교구의 입장을 대변했는데, 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때 다시 등장한 것이 해묵은 교회의 ‘정교분리론’이다. <가톨릭시보>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체질 개선의 본뜻-우리는 전환기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현실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정치의 실제 및 사례에 대한 불간섭원칙을 명심하고 교회의 발언은 항상 원리원칙에 입각한 간접적인 기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상 대구대교구에는 예나 지금이나 대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정의평화위원회’가 교구 산하에 없다. 그후 한국사회와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들을 수 있듯이, 이효상으로 대변되는 대구대교구와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매일신문> 등 교계언론은 반공주의라는 상수만 붙든 채 민주주의의 가치를 완전히 상대화시키는 길로 접어들었다. 

장면의 계보를 이은 김대중, 이효상은 박정희의 사람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한국교회의 일반적 경향은 아니었다. 적어도 박정희 군사정권 초기에는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박정희 정권에 부응하였으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경험하고, 1967년 강화 심도직물 사건과 원주 문화방송 부정부패 사건 등을 경험하면서 박정희 정권의 실상을 접하고 다른 차원의 정치적 참여를 모색하고 있었다. 해방공간에서 보여준 교회의 정치세력화가 아니라 민중의 고난에 참여하는 방식의 사회참여였다. 즉, 반공주의와 민주주의를 똑같은 무게의 상수로 다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는 장면의 정치적 계보를 계승하는 것으로, 한국교회 안에서는 김대중을 통해 현실화되었다. 그러나 이효상을 앞세운 대구대교구는 교구에서 소유한 언론 등을 통해 사사건건 교회의 이러한 흐름을 가로막고 나섰다.

이러한 교회 안의 서로 다른 태도는 1971년 4월 1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가시화되었다. 그해 3월 선거를 앞두고 민주공화당 경남지부 연차대회에서 이효상은 “이러한 시국에 대통령으로 모실 분은 박정희씨 오직 한 분 밖에 없다”면서, “후진국에 있어서 군세력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경우엔 흔히 쿠데타가 일어나는 것을 우리는 많이 보고 있다. 국가의 지도자는 군부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라야 지도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도 그릇된 판단이 아닌 줄 안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의장이던 이효상은 1963년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지역감정을 유도하며 “경상도에서 전라도표를 맞먹고도 백만표를 더 박 대통령에게 주자”고 공공연히 연설했다. 이는 김대중과 교감을 나누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이나 지학순 주교의 입장과 사뭇 다른 것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는 이효상(사진 맨 오른쪽)
박정희 전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는 이효상(사진 맨 오른쪽)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뽑던 유신정권의 폭압 속에서 ‘개헌 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벌어져,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 조차 민주화 운동에 동참하자, 1974년 1월 1일 서정길 대주교는 교구 사목협의회 주최 신년교례회에서 “현 시국은 온 겨레가 하나로 뭉쳐도 난국을 헤쳐나가기가 어려운 때”라면서, 최근 일부에서 주장하는 반체제 개헌 논의 등은 결국 혼란을 초래할 뿐이고, “정부와 국민이 서로 믿고 합심협력할 때 이 나라에 안정과 번영이 온다”고 말했다. 이어 서 대주교는 유신체제가 출범한 지 얼마 안되는 짧은 기간에 이에 대한 공과를 논란하는 것은 시기상조라고 몰아붙였다.(가톨릭시보 1974일 1월 13일자 참조) 그러나 이미 그때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지 13년이나 흐른 뒤였다.

그동안 국가안보와 경제개발을 볼모 삼아 박정희 정권은 초법적 권력을 휘두르며 헌정질서를 뒤집고, 대학에는 군인들이 진을 치고, 언론은 재갈이 물렸다. 수많은 민주인사들을 감옥에 보내며 박정희 정권은 종신집권 체제를 구축했다. 1976년 3.1절 명동성당에서 7명의 천주교 사제들과 문익환, 김대중 등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이 낭독한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이효상은 이 명동사건에 대해서도 “만일 존엄한 지성소가 정치의 선전장 혹은 정치의 소굴이 되었다면 이것은 간단히 묵과할 문제이겠는가?”고 물으며, 주교단이 문제를 일으킨 사제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압박했다. 한편 “나는 반공이 우리 대한민국의 최우선 공동선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선을 위하여 당분간 김일성이가 무력남침을 포기할 때까지 우리의 자유의 일부를 애국으로 유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신군부 지지아래 대구지역 언론 장악한 매일신문과 전달출 신부

1980년 광주학살을 감행한 신군부는 1980년 8월 27일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두환을 2,525표 가운데 무효표 하나를 뺀 2,524표라는 기록적인 찬성을 얻어 제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리고 해산된 국회를 대신해서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는 각종 악법이 쏟아져 나왔는데, 이 입법회의에는 대구대교구의 이종흥, 전달출 신부가 위촉되었다. 1981년 3월 23일 주교회의 정평위원회는 이들 두 사제가 입법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반대하는 건의서를 주교단에 제출했지만 주교단은 태도를 정하지 못했다.

2010년 3월 30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전달출 신부 소식
2010년 3월 30일자 <매일신문>에 실린 전달출 신부 소식

전달출 신부는 <대구매일신문>과 <가톨릭신문사> 사장 출신으로 한국반공연맹 이사를 역임했으며, 그후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운영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91년부터는 서정길대주교 재단 이사장을 맡기도 했다. <신부 전달출 회장 회갑기념논총>(1991년, 매일신문사)에 축하의 글을 실은 조선일보사 사장 방우영은 “전(달출)사장은 79년부터 83년까지 근 5년동안 신문협회 부회장으로 같이 있으면서 어려움과 즐거움을 같이 나누었다”며 칭송하고 있다.

같은 해인 1980년 11월 14일 신군부에 의해 방송사와 언론사들이 강제 통폐합 되었을 때, 대구대교구는 신군부의 혜택을 누렸다. 지방지는 1도 1지 원칙이 적용되어 대구대교구에서 발행되던 <매일신문>이 <영남일보>를 흡수해 대구의 유일한 일간지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1986년 5월 3일 인천집회 이후에 한국사회는 대통령 직선제 쟁취와 민주정부 수립이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는데, 그해에 이효상의 둘째아들인 이문희 주교가 보좌주교 딱지를 떼고 7월 5일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대구대교구 제8대 교구장이 되었다. 유신체제가 시작된 1972년 10월 7일 당시 38세의 나이로 대구대교구 보좌주교에 오른 지 14년 만이다.

이문희 대주교는 경북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아버지 이효상이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1962년에 프랑스 리옹 신학대학 철학과를 졸업하고, 1965년 파리에서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1986년 대주교가 되던 <가톨릭신문>과 나눈 인터뷰에서 “원래 나는 대학을 들어갈 때 정치가가 되려고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정치나 경제 등은 누구나 할 수 있고 할 사람도 많은데, 인간들을 하느님과 가까이 있게 해서 우리의 정신 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신부님이 되려는 사람은 드문 것 같아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문희 대주교가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은 대구대교구에서 아버지 이효상이 갖는 위상에 비추어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더구나 14년 동안 보좌하던 서정길 대주교의 정치적 성향에 깊이 침식되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한국사회가 직선제 개헌 논의로 다시 한번 뜨거워졌던 시기에 전두환은 모든 개헌 논의의 중단을 골자로 하는 4.13호헌조치로 대응했는데, 이에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최초로 4.13호헌조치를 만민주 반민중적 조치라고 규정하며 항의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그후 지속된 ‘직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 행진에 5월 4일에는 대구교구 사제들도 이례적으로 참여했다. 대구대교구 소속사제들은 “그 동안의 무관심과 무기력을 동반한 침묵을 반성하면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오늘과 내일의 온갖 고난에도 굴복하지 않을 것을 다짐하는 표현으로” 단식기도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교구장이 바뀐 직후라서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결국 이문희 대주교의 반대로 참여사제들은 주교좌 성당에서 ㅤㅉㅗㅈ겨나 개별적으로 기도회에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립된 섬에서 탈출하라!

이처럼 한국천주교회의 성장과정에서 유독 대구대교구만이 ‘지역교회’의 한계 안에서 군사정권과 한국사회의 기득권 세력에 유착되어 있었다. 이는 무소속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효상이 서정길 대주교의 엄호를 받으며 정치적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결국 대구교구는 한국교회의 공통의 경험에서 배제된 채 대구대교구만의 독자적 길을 걸어감으로써 사실상 한국사회 안에서 섬처럼 고립되어 있다. 더구나 이효상의 아들인 이문희 대주교가 서정길 대주교에 이어 보좌주교로 14년, 교구장으로 20년 넘게 봉직함으로서 더욱 굳어졌다.

교회는 주교의 재치권을 ‘통치’라고 표현하고 있듯이, 주교의 성향은 교구 전체에 미치는 파급력에서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절대적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효상과 <매일신문>이 갖는 대구지역 내 영향력 또한 대구민심의 향방을 결정짓는 방향타로 작용했을 게 뻔하다. 그런 점에서 대구지역과 대구교구는 ‘저들만의 천국’을 지난 50여 년동안 구가해 온 셈이다. 그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한국천주교회의 일원으로서 대구대교구가 복음적 선택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 그렇게 대구대교구는 고립된 섬에서 탈출해야 한다.
    
지난 6월 22일 열린 평화기도회에서 7만 개신교인들이 모여 이명박 대통령의 영상축사를 듣고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지난 6월 22일 열린 평화기도회에서 7만 개신교인들이 모여 이명박 대통령의 영상축사를 듣고 있다.(사진/한상봉 기자)

개신교 근본주의, 정치세력화 되고 있다

최근 개신교의 흐름이 심상치 않다.  지난 6월 22일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7만여 명이 모인 개신교의 평화기도회에 조지 부시 미국 전 대통령이 초청되어 간증했으며,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 등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한 한국기독교총연합회, 그리고 개신교 뉴라이트 집단은 이명박 대통령을 '이명박 장로'라고 부르며 근본주의 신앙으로 한국사회의 민주적 가치를 거덜내고 있다.

그들은 정치세력화되어 대통령 후보에 대한 신앙검증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명박 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지세력이 되었다.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의 김진호 연구실장에 따르면, 이런 근본주의적 신앙 유형을 가진 이들이 전체 개신교 신자의 90%정도 된다고 추측하고 있다. 즉, 개신교의 이러한 보수적 흐름에 대적할만한 저항세력이 개신교 내에는 존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1970년대 이후 개신교의 진보적 흐름을 주도해 갔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힘을 잃어버린지 오래다.

독특하게도 종교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는 한국사회의 현상을 경험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역시 전반적으로는 보수화되어 가고 있지만, 그래도 천주교회는 그 복음적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 천주교주교회의 의장인 강우일 주교가 <경향잡지> 7월호에 기고한 글처럼, "만일 오염되고 타락하고 폭력의 도가니라고 할 이 세상 한복판에서 씨름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과 평화를 선포하지 않는다면 그런 교회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등 성찰이 깊어지고 있다.

4대강 문제와 관련해 주교단에서는 '4대강 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생명평화미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보수성을 상징되는 '대구대교구'가 차지하는 위치는 각별하다. 더구나 대구지역의 지리적 특성상 한나라당의 표밭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대구대교구의 복음적 전환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nahnews.net> 2010년 06월 30일 (지금여기 = 평화뉴스 제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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