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달임에 푹 빠졌다 나온 끼.흥(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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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쟁이 김종흥 ③ / "20년 이발사, 척박한 하회마을 땅을 사다"


"꽃달임에 푹 빠졌지요. 아내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건 말건 안중에 없었습니다.
어찌나 재미있던지…."


‘꽃달임’은 ‘화전놀이’를 말합니다. 이를테면 진달래 꽃전 먹기 놀이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예부터 음력 삼월 삼짇날에 진달래 꽃전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중양절인 9월9일에 국화전이나 국화차를 만들어 먹은 것과 같지요.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못하던 시절, 부녀자들에게는 짧지만 달콤한 봄나들이의 자유를 호흡하는 날이었습니다.

화전놀이는 부녀자들이 들이나 산에서 꽃전을 부쳐 먹으며 하루를 즐기던 날 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는 처녀총각들이 어우러지는 만남의 공간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남녀유별이 아무리 강조되어도 이날만큼은 스스럼없이 만날 수 있었던 하루 야유회였습니다.

14살, 이발관 종업원으로...

더구나 70년대 농촌의 화전놀이문화는 젊은이들에겐 공인된 탈출구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이런 화전문화를 통해 끼와 흥(興)을 마음껏 발산했습니다. 이미 그는 결혼한 몸이었지만 때때로 곁눈질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 마음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스물한 살 때 열아홉 난 처녀와 선을 봤습니다. 처녀 집에 찾아가 얼굴을 보고 마음에 드는 표시로 밥을 얻어먹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 결혼을 했습니다. 

'장승쟁이'로 불리는 김종흥(56)님...그는 목조각 이수자이자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이기도 하다.
'장승쟁이'로 불리는 김종흥(56)님...그는 목조각 이수자이자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이기도 하다.

그는 결혼 전에 이미 자산 불리기에 재미를 붙이는 중이었습니다. 이발관을 하면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이발관 종업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물을 떠오고, 잔심부름이나 청소를 하는 말하자면 조수가 된 셈입니다. 그러다 차츰 주인 이발사의 인정을 받았고 마침내 이발사 대리로 손님들의 이발을 하게 됩니다.

그의 눈썰미나 손재주는 여기서도 마음껏 실력을 발휘합니다. 한두 해에 걸쳐 이발사 대리로 이발을 하는 동안 손님들의 인정을 받게 됩니다. 손님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것은 당연했지요. 얼마 후 그는 직접 이발 일을 하는 이발관 주인이 되어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섭니다. 이렇게 해서 시작한 이발사를 20년 동안 하게 됩니다.

88년, 하회마을 '문화콘텐츠'에 눈 뜨다

그의 손재주와 끼는 타고난듯합니다. 이발 일을 마치면 그의 손은 언제나 나무나 나무뿌리를 이용해 작품을 만드느라 분주했습니다. 이발관 옆에는 아예 작업장까지 마련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를 다니는둥마는둥 했습니다. 어려운 가정형편 탓도 있지만 그보단 공부에 취미가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6남매 중 그만 학교를 중도에 포기한데서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

타고난 손재주는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꾸리다시피하며 농기구 등도 직접 수리해서 사용했습니다. 헛간 정도는 혼자서 짓고 어지간한 것은 스스로 고치고 만들어 썼습니다. 여기에다 자식들을 위해 이십 리나 떨어진 곳에서 땔 나무를 해다 머리에 이고 다녔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과 억척스러움이 그에게도 알게 모르게 몸속에 스며들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 어귀 목석원(木石圓) 아랫마당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음을 가르치는 김종흥(56)님
안동 하회마을 어귀 목석원(木石圓) 아랫마당에서 하회별신굿 탈놀음을 가르치는 김종흥(56)님

1988년 그는 어머니와 함께 살던 고향 마을을 떠나 하회마을로 이사를 합니다. 그는 이발관과 슈퍼를 하며 번 돈으로 산 논밭을 정리합니다. 그리고는 하회마을 척박한 앞밭을 샀습니다. 주변에서는 고개를 갸우뚱 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좋은 땅을 팔아 오지에 가까운 곳에 다락 논을 샀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회마을의 장래를 미리 내다본 것일까요. 하회마을에서 그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거기에다 덤으로 수익도 올리는 그런 일을 말입니다. 요즘 이야기대로라면 ‘문화 콘텐츠’ 사업을 구상한 것입니다. 눈을 떠도 몹시 일찍 눈을 떴습니다. 그의 문화적인 끼와 경제적인 끼가 한꺼번에 발휘된 것이지요. 다르다면 요즘 흔하디흔한 책상머리에서 나온 계획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박창원의 인(人) 18]
네 번째 연재 장승쟁이 김종흥③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네 번째 연재, '장승쟁이'로 불리는 김종흥(56)님의 이야기입니다.
하회별신굿탈놀이 이수자이기도 한 김종흥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421-6151
독 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바랍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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