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은 왜 원수를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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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주쟁이 기자' 우호성① / "매일신문 복직, 사장 신부를 찾아가다"


"당신은 내 원수야. 싸움은 이제부터야. 이건 선전포고야!" 사장 신부는 사제관을 찾아온 그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가 사장 신부에게 한 말은 "내일 출근 하겠습니다"가 전부였습니다. 그 때가 1991년 초였습니다. 당시 사장 신부를 찾아간 이는 우호성 님 입니다. 사장 신부는 매일신문의 사장 이었고, 그는 그 신문사의 기자였습니다.

애초 그는 사장 신부를 찾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해직 무효 판결을 받아 회사에 출근하는 것도 보기 싫을 텐데 사제관으로 찾아 간다는 것은 부아를 지르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를 아껴주던 몇 선배들이 “미리 인사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강권에 못 이겨 울며 겨자 먹기로 사장 신부를 찾아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해직 무효 판결로 복직해 출근한지 한 달 만에 회사로부터 무기 정직을 당합니다. 말하자면 선전포고의 결과였습니다. 그는 또 다시 법적 투쟁을 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참습니다. 참는 게 약이 되었을까요? 6개월 만에 무기정직이 풀립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경남 창녕의 주재기자로 발령이 난 것입니다.

이 또한 부당한 인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만 두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걱정해준 동료들의 의견을 따라 회사의 방침에 따르기로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3년 가까이 유배생활 아닌 유배생활을 했다고 당시의 사정을 말합니다. 1993년 2월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스스로 그 신문사를 떠나게 됩니다.

우호성(61)님
우호성(61)님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그 연유를 따지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박정희의 1인정치가 막을 내리자 1980년 전두환을 정점으로 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 때 신문을 한도에 한 개 씩 두는 ‘1도1사’의 언론정책을 펼칩니다. 대구의 경우 역사가 더 오랜 영남일보가 매일신문에 통폐합 당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눈엣가시 같은 방송은 비판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도록 보도기능을 거세해버립니다. 기독교방송에서 보도를 할 수 없도록 한 것이 그 사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는 기자들에게 세제 혜택을 줍니다. 당근과 채찍으로 언론을 권력 편에 줄 세우고 길들이기를 시도한 것입니다.

이러니 언론 본연의 임무인 비판 기능의 실종은 당연합니다. 대신에 신군부를 찬양하는 왜곡언론, 관제언론이 활개 칩니다. 알면서도 외부 압력에 굴복해 쓰지 못하거나 사실이 아닌데도 쓰는 그런 일도 생깁니다. 정보형사가 무시로 신문사를 찾아와 편집국장 옆에서 편집국 동향을 살피는 그런 세월이었다고 합니다. 이 또한 신군부 핵심세력의 본바닥인 대구․경북은 더했으면 더했지 덜 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렇지만 억눌린 시민의 민주화 열망이 솟구치는 일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1987년 이른바 ‘6.10 항쟁’은 5공 정권의 몰락을 재촉하며 시민들의 힘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 내내 ‘정권홍보’라는 굴레에 갇혀 헤매던 언론에도 본연의 모습을 되찾아야한다는 당위성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언론계 안팎에서는 권력의 횡포와 부조리, 모순으로 무기력해진데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터져 나옵니다. 이는 편집권 독립 등을 갈구하는 젊은 기자들을 중심으로 언론사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으로 나타납니다. 1988년 7월. 편집국 기자 23명이 주축이 되어 그의 일터에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투쟁과 고난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2년 뒤, 노조사무장을 맡아 일하던 그는 회사에서 쫓겨납니다. 더구나 법적 투쟁 끝에 복직 결정을 받고, 사장 신부를 찾아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요. 더 놀란 것은 한솥밥을 먹던 그 자신이 어느새 사장 신부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박창원의 인(人) 26]
여섯 번째 연재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①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곡주사 이모'와 '하회마을 뱃사공', 노동운동가 '장명숙 세실리아',
'장승쟁이 김종흥', '고서 일생 박창호' 에 이은 <박창원의 인(人)> 여섯 번째 연재입니다.
매일신문 기자로 해고와 복직을 겪고 경향신문 부장을 지낸 '사주쟁이 기자' 우호성(61)님의 이야기입니다.
그 시절을 기억하는, 요즘 '사주쟁이' 우호성님과 사연 있으신 독자들의 글도 함께 싣고자 합니다.
- 사연 보내실 곳 : 평화뉴스 pnnews@pn.or.kr / 053-292-6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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