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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청년과 위대한 청년
송필경 / 전태일 서거 40주년, 조영래 서거 20주년에 부쳐
2010년 11월 12일 (금) 00:03:57 평화뉴스 pnnews@pn.or.kr

Ⅰ. 불편한 진실을 외치며 온 몸을 불사른 아름다운 청년

『1970년에 한 노동자의 고독한 행동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는 한국 노동운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섬유노동자인 전태일이 11월 13일 서울의 평화시장에서 분신했고, 불꽃이 그를 불사르는 순간에도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하고 외쳤다. 7년 전 사이공 시내에서 한 승려의 분신이 지엠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과 유사하게, 이 분신자살은 전 국민에게 충격을 주었다.』(브루스 커밍스의 현대한국사에서 인용)
    
   
▲ KKK단원들이 흑인을 장작더미에 묶어놓고 불을 지르고 있는 모습 /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1963년 베트남 사이공 시내에서 미국의 꼭두각시인 지엠 정권의 폭정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불교 고승 틱꽝득이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분신하였다. 놀랍게도 온 몸이 숯덩이가 될 때까지 가부좌 튼 자세를 꼿꼿이 유지하였다.

서구 언론은 경악했다. 갈릴레이와 함께 지동설을 주장한 중세시대 신학자 브루노 같은 사람을 또는 KKK단원들이 흑인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통닭구이 만든 경험은 있어도, 자기들 역사에서 신념으로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인물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 분신은 언론을 통해 전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감춰진 베트남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베트남 문제가 미국은 그토록 꺼려했지만 비로소 유엔에 상정 되었다.

   
▲ 1963년 베트남 고승 틱광득의 분신...온몸이 불 타올라도 가부좌자세를 꼿꼿이 유지하고 있다 / 사진. 송필경(베트남 틱광득기념관 사진을 촬영)
 
현재 프랑스에서 국제 참여불교 운동의 지도자로 주목받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당시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1963년 베트남 스님들의 소신공양은 서구 기독교적 도덕관념이 이해하는 것과는 아무래도 좀 다릅니다. 언론들은 그때 자살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저항 행위도 아닙니다. 분신 전에 남긴 유서에서 그 스님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압제자들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고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베트남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에 찢어지게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며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다니지 않은 어린 촌놈 전태일(1948~1970)이 입에 풀칠하기 위해 대구에서 찾아왔다.

평화시장 시장은 거대한 닭장 같은 고도착취 사업장이었다. 소규모 의류제조업자들이 3, 4층의 창고에 약 1.2m 높이로 마루를 깔고 이용할 수 있는 공간에는 모조리 작업대 하나, 재봉틀 한 대, 젊은 여자 한 사람을 집어넣는 것이 보통이다.

14~16살의 어린 소녀들이 마루바닥에 끓어 앉아서 오전 8시에서 밤 11시까지 하루 평균 15시간을 일해야 했다. 한 달에 이틀, 첫째 셋째 일요일에만 쉴 수 있었다. 할 일이 많은 때는 철야작업까지 했는데 깨어있기 위해서는 각성제(암페타민)를 먹었다. 하루 임금은 다방 커피 한잔 값인 50원이었다.

그때 다방은 일상적인 만남을 겸한 묘한 휴게 장소였다. 요즈음 커피숍 하고는 전혀 달랐다. 얼굴이 반반한 마담은 젊은 아가씨 몇 명을 고용해 커피를 팔았다. 야릇한 웃음을 띤 중년 남성이 아가씨를 불러 어깨를 밀착하면 아가씨에게 커피를 한 잔 사주어 공순이 하루 임금인 50원 매상을 올려야 했다. 다리에 손을 얹고 농을 주고받을 아가씨라면 계란 노른자를 띄운 뜨거운 쌍화차를 사주어야 했는데 한 잔에 200원 정도하였다.

어린 여공들은 열악한 작업 환경과 과도한 노동에 시달리다 못해 직업병인 폐렴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강제해고 당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동료 노동자 전태일은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 편지에서 나이 어린 소녀들이 안질, 신경통, 위장병, 폐결핵 등에 고생하고 있으며, 성장기에 한 번 고생하면 평생 고칠 수 없기 때문에 근로환경을 개선해줄 것을 하소연하였다.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을 말한 노동자는 같이 해고당했다.

해고당한 우직한 청년은 평화시장 노동조건 실태를 조사하던 중 ‘근로기준법’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공부하였으나 한자가 너무 많아 내용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청년은 이때 이렇게 되뇌었다고 한다. “대학에 다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답답한 청년에게 지식으로 도움을 줄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청년은 법에 규정되어 있는 최소한의 근로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의로운 분노를 느꼈다. 못 배운 젊은이의 분노가 자본주의 남한 사회의 근본 모순을 뿌리째 드러낼 줄을 그 누가 상상했겠는가?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바탕으로 노동청과 서울시에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줄기차게 제출하였지만 번번이 묵살 당하였다. 개선 요구 사항은 하루 근무시간을 10~12 시간, 일요일 마다 휴일, 정확한 건강 검진, 일당을 100원 정도 인상 해달라는 소박한 요구였다. 12시간 정도는 뼈 빠지게 일할테니 대신에 다방 아가씨에게 사주는 쌍화차 반값 정도의 일당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서 분신하는 모습
 
전태일의 분신은 1970년 11월 13일에 있었다, 나이 불과 22살이었다. 자신이 조직한 ‘삼동회’의 회원들과 노동자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근로기준법을 화형식 하기로 결의하고 평화시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와 경찰의 방해하여 시위가 무산되자, 전태일은 갑자기 온 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이고는 “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평화시장 앞을 달렸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말라”는 마지막 당부를 외치고 쓰러져 병원으로 옮겨졌다. 이 소식을 듣고 병원에 온 어머니 이소선에게 전태일은 “어머니, 내가 못다 이룬 일 어머니가 이뤄 주세요”라는 절박한 유언을 남기고 곧 숨을 거두었다.

깃털보다 가벼운 죽음이 있고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이 있다. 전태일의 장엄한 죽음은 민주화의 밑그림이 되었고 비로소 남한 사회의 자생적 진보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의 죽음은 어떤 거대한 담론 보다 더 큰 울림이요, 실존을 자각한 사자후였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이 없는 ‘바보’는 잔인한 현실에서 오히려 맑은 눈으로 사회 모순의 근본 핵심을 꿰뚫어 보았다. 잘 사육된 개의 순종적인 눈이 아닌 자유로운 들판에서 자란 늑대의 맑은 눈으로 말이다.
‘임금님은 벌거숭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비비꼬고 빙빙 둘러말하는 이론가들을 떠올리면 쉽게 알 수 있다. 먹물들의 고상한 렌즈로 보는 눈에는 직관으로 보이는 진실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자신도 겨우 입에 풀칠하면서 어린 누이의 더한 고통을 보고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픈’ 측은지심의 발현이 현실 모순에 대한 성찰로 이은 것이다.

만약 진보라는 말에 선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면 자신의 몸을 불사른 ‘바보’의 진보보다 더 고귀한 진보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진보란 현실 모순을 직시하고 개선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방이나 토굴 또는 수도원에서 얻는 관념적 깨달음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을 ‘바보’는 잔인한 현실에서 얻었다. 이 ‘바보’가 스스로 몸을 불태움으로써 비로소 한국적 진보는 첫 걸음을 힘자게 내디딘 것이다.

‘전태일이 없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인권은 수십 년 뒤에나 존중받았을 것.’, ‘전태일은 대한민국의 노동운동과 민주주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모두 지극히 옳은 말씀이다.

전태일의 단순한 외침-‘근로기준법을 지켜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은 남한 사회의 지식인과 기득권자에게 우리 사회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전태일을 불태운 울부짖음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였다.
순종해야 할 무지렁이가 내뱉는 정당한 외침, 이 듣기 싫은 불편한 진실에 대해 자본가와 압제자들은 경종을 느끼기보다 분노에 찬 짜증을 내었다.

순수한 영혼의 외침에 경종을 받고 청계천에서 계속되는 닭장 속 같은 삶의 고통을 동감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먼저 젊은 지식인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이 모였다.

죽은 지 3일 뒤인 11월 16일, 서울대 법대생 1백여 명은 그의 유해를 인수하여 학생장을 거행하겠다고 주장했다. 서울 상대생 4백여 명은 무기한 단식 농성을 벌였다. 그 뒤 많은 대학들도 추모 행렬에 가담했다.

22일 새문안교회 대학생 신도 40여명은 전태일의 죽음에 사회가 책임이 있고 자신들도 공모자라며 속죄를 위한 금식 기도회를 열었다.

23일에는 개신교와 천주교의 공동 집전으로 추모 예배를 거행하였는데, 여기서 김재준 목사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여기에 전태일의 죽음을 위해 애도하기 위해 모인 게 아닙니다. 한국 기독교의 나태와 안일과 위선을 애도하기 위해 모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젊은 지성인들과 양심적인 종교인들은 미처 몰랐던 노동자의 모진 삶에 대해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언론도 노동문제를 사회 이슈화 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이로써 정치계와 정당들도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에 비판을 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정희에 대항하는 야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은 1971년 1월 23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전태일 정신의 구현'을 공약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22년 밖에 살지 않은 무지렁이 전태일, 이 미약한 사람의 진실한 힘이 역사에서 무엇을 하였는지 우리는 지금 또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 청계천5가 평화시장 앞 버들다리에 있는 전태일 열사 동상 / 사진. 송필경

Ⅱ. 대학생 친구 조영래의 위대한 삶

    
조영래는 전태일보다 한 살 많은 1947년 생이다. 전태일은 초등학교도 제대로 나오지 못했지만 조영래는 경기고를 수석 졸업하고 서울대에 수석 입학했다.

조영래가 공부를 잘한 것은 전설에 가깝다. 고등학교 한문 시간이었다. 조영래는 강의를 듣지 않고 턱을 괴고 창밖에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열심히 강의하는 선생님의 눈에 조영래가 매우 거슬렸다.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그렇지 수업시간에 한 눈 파니 선생님은 자존심이 상해 살그머니 조영래 가까이 가 보았다. 조영래는 쏟아지는 눈을 감상하며 한시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조영래는 공부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서울대 나온 천재 중에 세 사람을 꼽으라면 조영래를 포함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아주 잘하면서 사회적 통찰력을 갖춘 사람을 찾는 것은 사막에서 물을 구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우리 교육제도에서 예나 지금이나 학업이라는 기능적 성과와 지혜?도덕?정의 같은 인간적 성숙을 동시에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업 중 덕담을 하는 선생님에게 공부 잘하는 놈이 ‘에이, 공부나 합시다!’라고 선생님에게 핀잔을 줘도 꼼짝 못하는 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 故 조영래 변호사
조영래는 희귀 돌연변이였다. 경기고 재학 시절 수석을 놓치지도 않으면서 6.3 한일회담 반대 시위를 주동해 학교에서 정학처분을 받았다. 1965년 서울대학교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덕분에 박정희에게 초청을 받아 청와대 구경도 하였다. 입신출세가 보장된 서울대 법대에 다니면서도 버릇은 여전해 박정희의 한일회담과 3선 개헌을 반대하며 학생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워낙 공부를 잘하였기에 퇴학을 모면할 수 있었다.

1969년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입학하였으며 1970년 전태일의 장례식이 서울 법대 주관으로 치렀을 때 조영래도 참석하였다. 1971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갔다.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자마자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으며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3년 4월 만기출소 후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어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년 간 쫓기는 생활을 했다.

위인은 시간을 헛되이 쓰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래는 도피생활하면서 전태일의 영혼에 찾아 갔다. 전태일 어머니 이소선씨를 만나고 당시 전태일과 함께 했던 청계천 노동자와 노동자들의 현실을 알기 위해 청계천 일대를 누볐다. 조영래가 본 것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가난한 노동자의 삶이었다. 많은 노동자를 만나며 지식을 전해주기도 했지만 오히려 노동자들에게서 삶은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도피기간동안 전태일의 삶을 완벽하게 복원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책을 집필하였다. 이 책은 『전태일 평전』이란 제목으로 1983년 전두환 정권의 모진 탄압에도 출간되어 우리나라 노농운동사에 가장 큰 울림을 남겼다.

1980년 복권 후 사법연수원에 복귀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과 서울 마포구 망원동 수재민 집단소송 등을 수행하면서 인권변호사로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87년 6.10항쟁으로 얻어낸 직선제 개헌에서 김대중과 김영삼이 후보단일화하지 못하여 어부지리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전두환의 쿠데타 정권을 청산할 기회가 날아가 버리자 조영래는 줄담배를 피우면서 쓰라림을 달랬다. 1990년 폐에 생긴 암이 위대한 영혼을 질식하게 하였다. 조영래의 이러한 병명을 누군가 ‘시대암時代癌’이라고 불렀다.

다시 정리해보자. 전태일은 암담한 노동현실의 근본원인은 근로기준법이 준수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전태일은 비록 초등학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법대 교재인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구했다. 전문적인 법학개념과 법률용어로 된 책과 씨름했다. 그는 이때부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죽어서 그토록 원했던 대학생 친구인 ‘위대한 청년’ 조영래가 찾아왔다. 혼과 혼으로 이어진 두 사람의 인연을 나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격조있는 만남’이라 부른다. 근대사에서 동학의 두 주역인 최제우와 전봉준의 만남처럼.

나는 우리나라에서 근현세에서 일어난 민중의 위대한 자각-다시 말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시대모순을 돌파한 시대정신-을 두 가지를 꼽으라면, 썩은 왕조체제에 저항한 전봉준의 동학농민항쟁과 자본주의에서 노동자의 자각을 일구어낸 전태일의 분신이라고 생각한다.

1970년대 이후 우리나라 모든 민주화운동은 이들 두 분-전태일과 조영래-에게 커다란 빚을 안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태일 서거 40년, 조영래 서거 20년, 지금 좌표를 잃고 방황하는 진보는 전태일과 조영래가 보여준 삶의 의미를 복원하여, ‘우리 언제든 그 분들과 함께 해요!’

   





[기고]
송필경 / 치과의사. spk5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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