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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논란, “그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 정재형

"국민 선동 위한 정체성 논란은 비겁한 짓"
2004년 08월 04일 (수) 10:11:52 평화뉴스 pnnews@pn.or.kr
요즘 ‘정체성(正體性)’이라는 말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길래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정체’란 ‘본디의 참모습, 본체(本體), 본마음’이라고 나와 있고 용례로 ‘정체가 탄로 나다’라고 나와 있었다. 결국 사물이 지닌 본래의 모습을 가리키는 것인데, 정체가 아닌 ‘정체성’은 제법 먹물이 묻어야 쓸 수 있는 말이고 일상용어는 아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인식을 묻는 의미로 쓰이면 의미가 더욱 모호해진다. 즉, ‘대한민국의 정체성’, ‘국가정체성’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고 특정한 상대방을 겨누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자’라거나, 또는 내가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지키겠다’라고 하면 상대방은 달리 반박할 방법이 애매하다.

따라서, 그 말은 모호한 주장으로 상대방을 침묵시키고 더 나아가 상대방을 반국가적인 집단이나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사람으로 매도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논리적인 말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고 좀 심하게 말하면 ‘비겁한 짓’이다.

왜냐하면, 적어도 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하려면 자신이 지키겠다는 대한민국의 정체가 무엇인지 먼저 특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체를 흔드는 상대방의 행위라든지 정체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행한 일 또는 앞으로 행할 태도를 설명한 후, ‘정체성을 흔든다’라고 주장해야 한다.

논의를 확대하면, 정체성이란 사변(思辨)적인 개념으로는 사용할 수 있어도, 일상적인 모든 사회현상 특히 국가에 대해서는 사용할 수 없는 단어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이 확정한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현재의 대한민국의 본모습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은 건국이래로 한 번도 특정한 모습으로 고정되어 있었던 시기가 없었고 늘 혼돈과 변화, 발전과 퇴보의 연속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헌법적으로 ‘대한민국의 헌법상 기본질서’ 또는 ‘대한민국의 국체(國體) 또는 정체(政體)’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위에서 든 것들도 개념상 일의적으로 확정된 것도 아니다. 또, 노무현 정권이 위와 같은 헌법상 개념을 침해했다는 증거도 없을뿐더러, 최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운운하는 사람들이 지칭한 것은 그것도 아닌 것 같다.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박정희 정권이래 계속돼 온 개발독재, 냉전, 친미, 정경유착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아야"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감안하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으로 가장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이것이다. 이제까지 대한민국에서 누대에 걸쳐 기득권과 불로소득, 경제적 렌트를 누려온 계층의 발언권과 경제적 이익, 정치적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가 대표수락연설을 통해 언급한 “지켜야하는 대한민국의 정체성”, 그리고 며칠 뒤 기자들에게 말한 “국가정체성을 흔드는 정부의 행위”에 대해서는 그것이 대한민국의 본모습이 아니라 한나라당이 지켜야할 보수 내지 극우세력들의 사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것도 그들로서는 충분히 지켜야할 이익이 됨은 물론이고 그것들이 앞으로 지켜질지 사라질지 아니면 더 커질지는 아무도 알 수 없고, 앞으로의 대다수 국민의 순간 순간적인 정치, 경제, 역사적 선택에 의해 결정될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방어하겠노라고 깨놓고 솔직히 말하지 않고, 겉에 설탕을 입혀 군부독재, 권위주의적 정권의 정치행태에 익숙해져 있는 국민들을 선동하는 수단으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들고 나오고 있다. 나아가 자신들이야 말로 유일한 우국인사들의 집단인 양, 70-80년대부터 군부독재에 항거하고 군부독재를 끝장낸 사람들의 집권 자체를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흔드는 것으로 모는 것은 비겁한 것이라는 말이다.

이제 한나라당과 박근혜 대표는 자신들이 지키고 싶은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그것이 박정희 정권이래로 계속되어온 개발독재, 냉전, 친미, 인권탄압, 정경유착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는 증거를 내놓아야 한다.

정재형(변호사.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구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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