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해가 저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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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한 해가 저물어 갑니다. '벌써 3년이 훌쩍 지나갔다'며 아쉬워하는 사람과 '아직 3년 밖에' 지나지 않았냐며 탄식을 하는 사람들... '아직 2년씩이나 남았다'며 자신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사람들과 '이제 2년 밖에 남지 않았다'며 희망의 끈을 다잡는 사람들...그 틈새에서 생잡이로 땅속에 파묻히는 축생(畜生)들의 비명소리가 사방팔방에서 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육당한 수많은 축생들의 극락왕생을 비는 법고소리가 울려 퍼져야 할 절간에는 불퇴전의 결의를 담은 펼침막들이 펄럭이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이 나라가 복지국가가 맞다고 했는데, 자식처럼 기르던 생명들을 땅에 파묻어야 했던 축산농민들에게 정부가 어떤 대책을 마련해줄지 궁금합니다.


 12살 어린 소녀에게 술을 먹이고 윤간까지 한 20대 청년들에게 죄가 없다는, 엽기적(?)인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12살짜리 소녀가 술을 먹었어도 20대 청년 세 사람에게 저항하지 못할 정도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법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을 짓뭉개 버리는 세상입니다. 집권당의 원내대표는 주먹이 정의라 부르짖고, 이 나라 대통령은 주먹을 휘두른 국회의원에게 격려의 전화를 합니다. 게다가 한반도의 하늘과 땅은 대포, 총포 소리에 싸늘하게 얼어 붙어버렸습니다. 어수선하다 못해 살풍경스런 연말입니다. 10년 동안 탐욕에 굶주려왔던 호랑이들이 떼거지로 몰려나와 여기저기 온 천지를 휘젓고 다닌듯한, 처참한 풍경의 경인년 연말입니다.

   한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남아있는데(漢國山河在)
   진시황 무덤에는 초목만 무성하다(秦陵草木心)
   해는 저물고 구름은 천리에 뻗쳤는데(暮雲千里色)
   어디 한 곳 마음 아프지 않는 곳이 없구나(無處不傷心)
                                                        題慈恩塔- 荊叔


 국가와 권력을 동일시하던 고대사회에서도 나라는 망해도 조국의 산하(山河)는 변함이 없고 무상한 것은 권력뿐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이 새 세상을 세우는 밑거름이기도 했습니다. 길고도 긴 역사에서 5년 이란 짧은 시간, 한시적으로 주권자들인 국민들에게 위임받았을 뿐인 권력이 이 나라의 산하마저 짓뭉개고 있습니다. 나라도 망하고 산하마저 남아나는 게 없을 지경입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알아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가장 고통스러운 법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서글퍼서 그 어느 때보다 춥고 괴로운 연말을 보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집권여당의 대표는 자연이 만든 “룸”으로 기어 들어가 “자연산”을 즐기며 흥청망청 살고 싶었던 속내를 만천하에 공개 했습니다만 정작 그가 죽어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자연이란 것이 남아 있을 지 의문입니다. 보온병에 가득 담긴 따스한 물 마시며 천릿길을 헤매봐야 사방이 모두 콘크리트로 “성형”된 인공구조물뿐일 것입니다.

 “하늘과 땅 사이를 횡(橫)으로 말하면 상하(上下)·사방(四方)인 우(宇)가 되고, 종(縱)으로 말하면 왕고내금(往古來今), 지난 옛적부터 지금을 이르는 주(宙)가 되는데, 그 우주(宇宙)는 넓고도 멀고, 가없이 너르고 또 길어 끝이 없다(無涯涘, 無終極)” 하였습니다. 우리가 역사라 부르는 것이 바로 우주일는지도 모르지요. 끝이 없어 가늠하기조차 힘든 우주에서 끝이 있는 것은 인간이 저지르는 일(事)이요, 인간이 만들어 저질러 놓은 물(物)뿐입니다. 그래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하였겠지요. 해 저물면서 또 다른 한 해에 대한 희망과 기대가 움터 오르는 까닭도 바로 물극필반(物極必反)이란 절대 변하지 않는 우주의 법칙을 믿기 때문입니다.

 천지(天地) 사이의 텅 빈 공간에서 근본을 이루는 것은 사람을 비롯한 뭇생명들이 가진 삶의 의지일 것입니다. 견고한 콘크리트 사이의 실낱같은 틈을 비집고 나와서라도 살아 올라오는 풀의 힘...삶을 가꾸고 키우려는 의지... 이 한 해 곧 저물면 또 닥쳐올 한 해 살아야겠지요.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도 면면히 이어지고, 또 지치지도 않는”(綿綿若存, 用之不勤, <도덕경> 6장)는 삶의 의지로서... 그 의지가 바로 지금의 절망을 넘어 새 세상에 대한 희망을 키우는 씨앗이라 믿습니다. 또 한 해가 저물면서 이듬해에 대한 기대와 희망, 그리고 결의가 솟아오름을 느낍니다.
 
[연재] - <시,서,화가 있는 집 - 서류당 39 > 글.사진 / 김진국


<시, 서, 화가 있는 집 - 서류당> 연재입니다. 서류당(湑榴堂)은 '이슬 머금은 석류나무가 있는 집'으로,
시 도 있고 글도 있고 그림도 있어 편안하면서도 자유롭게 수다 떨 수 있는 그런 조용하고 아담한 집을 뜻합니다.
이 연재는 매주 월요일 김진국(의사. 신경과 전문의) 선생님께서 쓰십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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