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학생들과 곡주사에 왔어. 인터뷰를 하라카니 빨리 끊어."
곡주사를 떠난 이모를 곡주사에서 만났습니다. 남산동의 반지하방에서 오랜만에 외출을 한 것이지요. 암울했던 시절 통곡과 희망이 교차하던 곡주사. 입에만 올려도 애틋함이 밀려오는 그 이름. 학생들에게 손수 담은 동동주와 두부김치를 내고 싶다는 이모의 바람은 그야말로 바람으로 끝나겠지요. 그래도 어젯일처럼 이모의 그 소리는 귓속을 맴돕니다.
"콩나물국에 밥 말아 묵고 술 무라." (정옥순 님)
"나에게 자랑이었던 선배들은 명대로 못살고 다 떠났지요."
통일운동의 댓가로 그 또한 몇 번이나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1976년에는 감방 동지 2명과 자장면을 먹다 국가전복을 꾀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됐습니다. 그는 이제 통일꾼 시인으로 열정을 불태우고 있습니다. 이미 5권의 시집을 냈습니다. 그의 민족자주통일운동이 시적 영감으로 전이된 모양입니다. 칠순을 훌쩍 넘긴 그의 인생열정은 이제 고인이 된 선배의 팔순 때 지은 축시에 그대로 묻어납니다.
"여든, 지금부터 시작입니다." (류근삼 님)
"식모살이는 하지 마라."
선생님이 당부하셨지만 첫 노동은 식모살이였습니다. 직물공장의 ‘소녀 여공’으로 출발해 가톨릭 노동 청년회를 통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시작한 보험일. 최근에는 대구 최초의 직선 아파트 입주자 대표회의 회장을 지냈습니다. 몸속에 고생의 흔적은 남았지만 삶은 변함없습니다. 그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꿈인 ‘노동자 쉼터’를 물어보지 못했지만 대답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겠지요.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은 한다." (장명숙 님)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
그는 이 수필집에 이끌려 불교의 세계에 빠졌고 붓다라는 최고의 벗을 만났습니다. 그는 맨 처음 삭발했을 때 너무 예쁘다는 소릴 들었다고 합니다. 그의 ‘유쾌한 출가’는 이렇게 시작됐지요. 그리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키팅 선생님에 반해 교사가 되었습니다. 학창시절 꿈마저 비구니 스님이었던 그의 ‘행복찾기’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자연이나 인연을 거스르며 행복을 말할 수 있나요?" (아용 스님)
"농민이 망하면 노동자는 뻔하지 않습니까."
농사꾼 철학자의 생각은 변함이 없고 거침이 없습니다. 생존과 직결된 우리의 먹을거리를 포기하고서야 당당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대구 한살림을 지금껏 꾸려오고 있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겠지요. 그는 요즘 건강이 예전 같지 않아 창녕의 농사일 갈무리마저 아들에게 맡겼습니다. 그는 연재가 끝난 뒤 조목조목 바로잡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소농을 버리고 가면 십리도 못가 발병 난다’는 그의 말 그대롭니다. (천규석 님)
"아무리해도 그 살림이니 무슨 재미니껴."
뱃사공은 여전히 하회 나룻터에서 삿대를 잡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배삯을 ‘출입’ 이라 부르며 곡식을 받았지요. 지금은 학생 같은 단체손님에 기대는 형편입니다. 그렇다고 손을 놓을 수도 없습니다. 소작이 많은 그에게 뱃사공은 농삿일처럼 매달려야 하는 생계형 부업입니다.
뱃사공이 동동주를 마시는 그 자리에 장승전도사도 함께 했습니다. 그는 1999년 하회마을을 찾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73세 생일잔치 때 축하 건배를 했지요. 그의 생일은 여왕과 같은 4월 21일입니다. 뱃사공과 장승쟁이. 하회마을의 타성바지인 두 이방인은 같으면서도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이창학 님, 김종흥 님)
"글쟁이는 사주에 맞습니다."
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원리를 담은 지혜의 소산이라는 주역. 이는 괘가 같아도 시기와 상황이 다르면 해석도 달라져야 한다는 의미겠지요. 그는 젊은 시절 언론사에 입사해 해직과 재입사, 무기정직과 퇴사의 고달픈 길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명리학(命理學)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이야기하며 기자는 사주에 맞았다고 합니다. 몇 차례 만났지만 아직 듣지 못한 대답을 다시 묻습니다.
"사주쟁이는 사주에 맞는 것일까요?" (우호성 님)
"단돈 30원에 산 문고판을 10만원에 판 일도 있지요."
헌책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일은 고서점 주인의 능력이라며 우쭐했습니다. ‘책을 읽어야 (사람)구실을 한다’며 책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여든이 넘도록 대구 고서점 거리를 떠나지 못했지만 지난 여름에 영영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저 세상에서 평소 꿈꾸던 고서거리를 만들며 이승에서의 습관 그대로 말하고 있겠지요.
"밥 먹다가도 헌책 냄새가 나면 밥맛이 없어져." (고 박창호 님)
▪ 덧붙이는 글
재야의 고수(?) 선배를 만났습니다. 맥주를 마시다 벽 앞에 섰다 떨어지고, 어정거리며 온몸으로 시범을 보였습니다. ‘까치발로 오래 서 있지 못하고, 겅둥걸음(큰 걸음)으로는 오래 걷지 못한다’는 것을…. 자기모습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기자불립(企者不立) 과자불행(跨者不行)’ 이야기입니다.
‘자기모습의 이야기를 자신의 소리로 내자’는 것이 ‘박창원의 인(人)’입니다…. 연재 중에 언짢았거나 거슬린 부분이 있었다면 너그러이 이해를 구합니다. 변변찮은 원고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과 평화뉴스 가족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구태여 군소리 하나 얹으면, 여전히 많은 분들의 못다한 이야기는 훗날로 미루려 합니다.
[박창원의 인(人) 45]
글.사진 / 평화뉴스 박창원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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