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③ "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웠다"

평화뉴스
  • 입력 2004.08.10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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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청년이 함께 찾은 원폭피해자회관.
...4명 중 1명은 피해인정 안돼, 2세도 고통
...일본 청년들,"우리는 역사를 잘못 배웠다"


원폭피해자 김일조(77) 할머니.
원폭피해자 김일조(77) 할머니.

"나는 전쟁 피해 속에서 평생 차별 받으며 살았어."
원폭피해자 김일조(77) 할머니는 원폭피해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힘없는 민간인으로 2차 대전과 한국전쟁까지 겪었지만, 일제시대에는 일본 땅에서 한국인이라고 차별 받았고, 광복 후 한국에 와서는 원폭피해 때문에 하루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는 김할머니.

부모님이 생계문제로 일찍 일본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김할머니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 때문에 어릴 때는 한국말보다 일본말을 더 잘했지만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멸시와 차별을 받았다.

18세였던 어느 날 하늘에서 번쩍 하는 섬광과 폭발음이 들리더니 곧 집이 무너져 내리고 김할머니는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가 무너진 집에서 김할머니를 겨우 찾아내 목숨은 건졌지만 이후 몸에 남은 상처와 함께 원인 없이 심장병을 앓아야했다.

광복 후 부모님을 따라 한국으로 왔지만 자신이 원폭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주위 사람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자식들이 결혼할 때까지도 비밀로 했다. 그리고 지난 97년 남편이 숨지자 마음을 기댈 곳이 없어진 김할머니는 혼자서 경남 합천의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찾았다.

일제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인은 대부분 생계를 위해 군수공장이나 탄광에서 힘든 노동자 생활을 해야했다. 그리고 59년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폭은 이들에게 치료되지 않는 질병과 가난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더구나 원폭피해자라는 이유로 사회적 냉대까지 고스란히 받아야했다. 차라리 그때 죽는 게 더 나았을 거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김일조 할머니는 다른 분들에 비해 말과 행동이 자유롭지만,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혼자서는 밥도 못먹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 피해자도 많다.



◇ 물리치료를 받고 있는 합천의 원폭피해자 할아버지들.


경남 합천에 있는 원폭피해자복지회관. 합천 시내에서 떨어진 한적한 도로가에 세워진 이 회관은 한국의 유일한 피폭자 복지시설이다. 지난 97년 완공돼 지금은 75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조용하게 남은 생을 보내고 있다. 이들은 몸에 남은 원폭피해와 함께 보이지 않는 마음의 상처까지 안고서 평생을 살았다. 설립 초기에는 요양시설 정도로 여겨져 방문객이 거의 없었지만, 최근에는 한국인뿐 아니라 일본인들도 자주 이곳을 찾고 있다.

지난 7월 재일교포 3세로 구성된 재일코리안청년연합 KEY(Organization of United Korean Youth in Japan) 회원의 방문에 이어, 이번 8월에는 일본 청년들과 재일교포 등 23명이 이곳을 찾았다. 이들은 어제(8.9) 오전 대구에 도착해 오후에 대구KYC(한국청년연합회. Korea Youth Corps) 청년들과 함께 합천을 방문했는데, 한국에도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재일교포 3세 손명수(36)씨.
재일교포 3세 손명수(36)씨.
피스보트(peace boat) 회원인 모리오카 료지(26)는 "국가의 의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교과서 어디에도 한국인 피폭자가 있다는 내용은 없기 때문에 일본 청년들 거의 모두가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나 또한 충격을 받았다"며 "오늘 한국인 원폭피해자를 직접 만나보고 확인한 뒤에 일본으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알려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합천을 두 번째 방문하는 재일교포 3세 손명수(36)씨도 "한국에 원폭피해자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서는 공식화 돼있지 않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며 "특히, 일본인 피폭자의 경우 정부에서 그 보상을 잘하고 있고, 일본의 청년들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라서 무관심이 더욱 크다"고 말했다.

이들은 준비해 온 악기 연주와 노래 공연 뒤, 할머니, 할아버지들과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한 일본인 여학생은 피폭자 할머니의 손을 잡고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복지회관 뒤뜰의 위령각에서 위령제도 지냈는데, 종이학 천마리를 엮어 살아 계신 분들의 장수를 기원하는 한편, 평화의 메시지도 전달했다. 이 위령각은 다카하시 고오준이라는 일본인이 참회의 마음으로 사비를 들여 지은 것으로 현재 한국인 원폭피해자 796명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일본 민간인들이 이처럼 적극적인데 비해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그리 활발하지 않다. 지난 1990년 배상차원이 아닌 인도적 차원에서 40억엔을 지원한 것이 전부다. 대한적십자사가 이 돈을 관리하며 그 일부로 원폭 피해자가 가장 많이 사는 경남 합천에 원폭피해자복지회관을 세웠다. 또, 피폭자로 등록된 사람들에게 월 10만원의 의료보조금과 사망시 150만원의 장례비 지급, 지정병원 무료진료 등의 지원을 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지난 96년에 모두 고갈돼 지금은 정부가 대신 지원하고 있다.



◇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위패가 모셔진 위령각(오른쪽 사진)에서 청년들이 위령제(왼쪽 사진)를 지내고 있다.

일본 정부가 원폭 피해자 보상을 위해 발행하는 '피폭자 건강수첩' 또한 까다로운 절차 때문에 한국의 많은 피해자들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피폭자로 등록된 사람은 2천여명. 이 가운데 1400여명만 일본 정부의 심사를 거쳐, 월 35만원의 의료보조비가 지급되는 건강수첩을 받았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일본으로 가는 것은 물론이고 2명의 증인까지 필요하기 때문에, 나머지 500여명의 한국인은 피해자임에도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원폭피해자 1세에게는 그나마 일부 지원이 이뤄지고 있지만 현재 7천여명에서 1만여명으로 추정되는 원폭피해 2세들은 그 실태조차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을 정도로 외면당하고 있다.

김할머니도 혹시 자식들에게 갑자기 원폭 피해 증상이 나타날까봐 매일 가슴을 졸이며 생활한다.
"억울하지, 억울해.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일제 36년의 역사가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60년간 겪었던 우리의 고통도 사라지지는 안거든. 결국에는 이것을 어떻게 마무리하고 처리하는가가 중요한 거겠지. 그게 우리가 죽기 전에 한국과 일본 양쪽이 해야될 일이라고 생각해."

이곳 합천 복지회관에서만 일년에 10여명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숨지고 있어, 원폭피해자들을 치유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세상을 떠나는 원폭피해자들.
이제 전쟁 피해의 문제는 더 이상 피해자만의 몫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두의 과제이다.

글.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pnsun@pn.or.kr







◇ 원폭피해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합천을 찾은 한국과 일본, 재일교포 청년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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