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감춘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평화뉴스
  • 입력 2004.08.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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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⑤>"정신대 이용수 할머니의 한맺힌 삶"
..."일본은커녕 조국에서도 위로 한번 못 받아"
과거사 말하지 않겠다는 노대통령 말에 또 한번 상처
..."대한민국 딸로 태어난 죄밖에 없는데..."


정신대 피해자 이용수(76) 할머니.
정신대 피해자 이용수(76) 할머니.
"잘못된 역사는 감춘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나와 같은 정신대 할머니들이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있는 한 일본 정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 앞에서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1945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해방을 맞았지만 정신대 할머니들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해방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피해에 대한 일본 정부의 보상과 사과는커녕 한국 정부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아 가슴의 한이 더욱 깊어질 뿐이다.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의 이용수(76) 할머니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용기를 내 자신의 과거를 세상에 알리고, 사회 활동을 한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위안부 시절을 생각하면 눈물부터 고인다. 대구가 고향인 이할머니는 7남매 가운데 고명딸로 태어났다. 집이 가난해 낮에는 목화 솜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학을 다니며 어렵게 자랐다.

지난 1944년 16세 나이로 정신대에 끌려갔는데, 몇 달동안 평안북도 안주와 만주를 거쳐 배를 타고 도착한 곳은 대만이었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차마 남에게 말 할 수 없는 악몽 같은 일을 겪었다. 게다가 조금이라도 일본군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김없이 폭행을 당해야 했고, 모진 전기고문까지 받았다. 그 후유증으로 이할머니는 아직도 편하게 잠드는 날이 별로 없다.

1945년 해방이 됐지만 할머니는 다음해인 46년 5월에야 어렵게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의 끝은 아니었다. 딸이 죽은지 알고 제사를 지내던 어머니는 살아서 돌아온 이할머니를 보자마자 실신했다. 가족들 누구도 이할머니가 정신대에서 겪은 일을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고명딸이 결혼하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했고,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을 했던 오빠마저도 한국전쟁 때 양민학살로 목숨을 잃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20대 모습.
이용수 할머니의 20대 모습.
전쟁 피해자이지만 그 피해조차 밝히지 못한 채 그늘에서 살아온 몇 십 여년. 이할머니는 죽기 전에 가슴에 맺힌 억울함이라도 풀고 싶어 지난 92년, 자신의 과거를 세상에 밝혔고, 그때부터 일본 정부에 대해 공식적인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 반전평화 시위에도 참여하고 있다.

광주에 있는 정신대 할머니 요양시설인 나눔의 집을 비롯해 같은 처지에 있는 전국 곳곳의 할머니들과 교류하며 증언활동을 하고, 중국과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등 다른 나라 정신대 피해자들도 만나고 있다. 특히, 국제행사 때나 만날 수 있는 북한의 정신대 할머니에게 더 애착이 간다고 한다.

최근에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쟁피해자와 함께하는 이라크 파병반대 행진'에 참가해 전쟁 반대에 목소리를 높였다.

또, 얼마전 고 김선일씨가 희생됐을 때는 부산으로 찾아가 미군부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내가 굳이 찾는 것도 아니고,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니지만 전쟁에 반대하는 일에는 저절로 발걸음이 향한다"는 이용수 할머니.

"처음 이 사실을 밝히기까지 정말 힘들었어. 많은 용기가 필요했지. 하지만 이제는 이렇게 당당한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우리 정부도 정신대 피해자에 대한 문제를 일본에 당당하게 요구해야해. 내 죄는 대한민국의 딸로 태어난 것 밖에 없는데 아직까지 일본은커녕 조국에게도 위로 한번 못 받았어."

지난 7월 25일 '전쟁피해자와 함께하는 이라크 파병반대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용순 할머니.
지난 7월 25일 '전쟁피해자와 함께하는 이라크 파병반대 도보행진'에 참여한 이용순 할머니.
이할머니는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고이즈미 일본 총리를 만난 자리에서 "임기 내에 과거사 문제는 말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또 한번 가슴에 멍이 들었다. 정신대 할머니 대부분이 7,80대의 고령이기 때문에 언제 숨을 거둘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이할머니는 "그 사이 노환으로 전쟁의 증인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달서구 상인동 비둘기 아파트에는 이할머니를 포함해 정신대 할머니 5명이 살고 있는데, 모두 혼자서 생활한다. 그 가운데 할머니 두분은 건강이 악화돼 지금 병원에 입원중이다. 만약 이 할머니들이 집에 혼자 있다가 숨을 거둬도 그 사실을 빨리 알 수는 없는 실정이다.
매일 아침 뒷산에 오르며 스스로 건강을 챙기는 이용수 할머니도 "잠들기 전에는 내일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난 절대 빨리 죽지 않을 거야. 일본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잘못을 알면서도 절대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어. 많은 할머니들이 역사의 증인으로 살아있지만 보상은 물론 사과도 아직 못 받았지. 공식적인 사과와 법적 보상을 받기 전까지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어"

현재 정신대 피해자로 국가에 등록된 사람은 모두 215명. 이중 살아계신 할머니는 131명 뿐이고, 대구경북에는 21명의 할머니가 살아있다. 일제시대 정신대에 끌려간 한국 여성은 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비교해볼 때 턱없이 적은 수다.

이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한꺼번에 할머니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할머니들도 상당수가 먼 이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온 할머니들은 주위의 시선 때문에 정신대 피해 사실을 입밖에 내지 못했는데, 90년대가 돼서야 정신대 피해자 등록이 활발해져 그 사이 숨을 거둔 할머니들도 많은 것으로 파악된다.



◇ 지난 2002년 평양에서 열린 '일본의 과거청산을 요구하는 아시아지역 토론회'(왼쪽).
북한의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오른쪽 사진.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이용수 할머니)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박정희 간사는 "할머니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아무런 사죄나 보상이 없고, 한국 정부도 생활안정지원금 정도가 전부"라며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은 할머니가 숨을 거두는 상황에서 정부가 지금이라도 일제 과거사 청산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박간사는 또, "정부의 방치만큼이나 시민들의 무관심도 크다"면서 "언론에서도 정신대 할머니 문제를 연예인 등에 관련한 가십거리로 다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해방 60년이 가까워오지만 아직까지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진상규명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다. 정신대 할머니 20만명과 강제징용 된 군인 등을 포함해 800만명이 2차대전에 강제동원 된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최근 정부는 ‘일제 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 등에 관한 특별법’을 오는 9월부터 시행해 뒤늦게나마 자세한 조사에 들어가기로 했다.

"정신대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야. 피해자들이 증인으로 살아있는 한 현재의 일이야. 내가 바라는 것은 일본 정부가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우리에게 사죄하는 것. 그것 뿐이야."

이 할머니들의 간절한 바램이 이뤄지는 날에야 대한민국은 진정한 해방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글.사진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pnsun@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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