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지 기자의 사회적 행복" - 영남일보 정혜진 기자

평화뉴스
  • 입력 2004.08.1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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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주변을 서성이던 과거..나는 이제 그 과거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눈에 담으려고 애쓴다.“


별 ‘빽’이 없는 집안에서 자란 나는 기자 초창기 시절에 글 쓰는 재미 외에도 고위 공직자, 경제계 CEO, 잘 나가는 문화계 인사들을 만나면 내 신분이 상승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었다. 아가씨가 나오는 술집에 처음 가서 내 또래의 여자들이 술 접대를 하는 것에 충격을 받고 엉엉 울기도 했지만, 나는 곧 그런 생활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됐다. 특히 분위기 있는 고급 찻집, 공연장의 R석, 철마다 그림이 바뀌는 집들을 방문하는 ‘교양 있는 생활’에 익숙해진 나는 기자가 된 건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했다.

‘기자 정혜진’이 신분이 바뀌거나 ‘교양’이 풍부해지는커녕 권력의 찌꺼기를 핥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건 몇 년이 지나서였다. 깨달음은 대가 없이 오지 않았다.

기자(記者), ‘쓰는 놈’, 그러니까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게 기자다.
전통적으로 무(武)보다는 문(文)을 숭상한 우리나라 문화에서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지위가 그리 나쁜 편은 아니었다. 입사할 때는 그랬다. 그런데 97년 국가가 외환위기로 흔들릴 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소득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소득은 직업의 선택과 평가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잣대 가운데 하나인 것은 분명하다. 소득이 줄어들면서 그동안 즐기던 ‘교양’도, 나와 비슷한 신분에 있다고 생각한 ‘높으신 분들’을 만나는 일도 힘겨워졌다. 당장 먹고 사는 일이 걱정인데 ‘있는 척’하고 사는 것 자체를 할 수 없었다. 몇 년이 지나 다른 직업이 그렇듯 기자들도 과거의 지위와 신분을 회복했지만, ‘지방지 기자’에게 ‘봄’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난 억울했다.
기자로서 처음에 기대했던 신분 상승은 고사하고 원래의 내 지위조차 끝없이 추락한 느낌이었다. 권력의 주변을 서성거린 과거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사회적 통념으로서의 전문직종 ‘기자’와 추락한 ‘영세 중소기업’ 직원, 두 신분이 합쳐진 ‘지방지 기자’로서의 일상은 견딜 수 없는 모순 덩어리였다. 난 공부를 핑계로 해외로 도피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귀국 후 다시 맞닥뜨린 현실은, 마약을 끊고 금단현상에 시달리는 것처럼, 도피 전보다 훨씬 힘들었다.

2002년, 뜻 밖의 위로를 만났다.
최고의 명문대를 나와 남들 부러워하는 유학까지 간 한 젊은 엘리트가 누명을 뒤집어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내 인생은 내 의지로 바꿔갈 수 있다’고 믿었던 이 젊은이는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암담한 현실이 억울하고 분했다. 괴로움과 억울함이 견딜 수 없다 못해 삶의 끈을 포기하게 만들 즈음, 그는 감방의 독방을 찾아온 파리며 거미, 쥐들과 친구가 되었다. 풀 한포기, 벌레 한 마리와 정다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고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도 다 나와 같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니 감옥 생활이 즐거워졌고, 억울함을 밝힐 것도 포기해 버리니 자연스럽게 바깥에서 구명운동이 펼쳐졌다. 출소해서 농사를 짓는 생태운동가가 된 황대권님. 그의『야생초편지』는 내게 희망을 보여주었다.

"자본을 이겨내기 위해 꼭 더 큰 자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폭압과 폭정을 이겨낸 건 더 큰 폭력이 아니라 모든 걸 버린 비폭력이었다."


그가 만약 엘리트 코스를 계속 밟아갔다면 ‘세상일은 의지만 있으면 된다’는 믿음 때문에 그는 현실의 여러 모순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감옥에 끌려가는 일이 없었다면 아마도 그는 고위 공무원이 되었거나 교수가 되었을 텐데, 세상 모순을 이해할 수 없는 엘리트가 만들어내는 정책과 강의는 아마도 별 볼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능력은 폄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의 13년에 걸친 불행, 그리고 그 결과로 나온 글은 그가 평범한 공직자나 교수가 되어 사회에 미쳤을 영향보다 우리 사회를 훨씬 더 행복하게 해 주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그의 개인적 불행은 사회적으로는 행복이 아니었을까.

추락을 맛 본 지방지 기자인 나는 이제 권력의 찌꺼기를 핥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눈에 담으려고 애쓴다. 좋은 지위에 있었을 때는 하찮아서 관심을 갖지 않는 그런 기사 말이다. 잘 나갈 때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했던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게 됐으니 지방지 기자의 ‘신분 강등’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하지만 여전히 현실은 현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좋은 기사를 만들어낸다. 자본은 좋은 인력을 끌어들이고, 충분하게 교육시키고, 기사 한 꼭지에 넉넉한 시간을 투자할 수 있게 만든다.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던 중앙지들이 경쟁적으로 소외된 이웃 기획 시리즈를 내면서, 그 파장으로 외국인 전용 병원이 지어지는 현실은 그 씁쓸한 진리를 새삼스레 깨닫게 한다.

그러나! 자본을 이겨내기 위해 꼭 더 큰 자본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폭압과 폭정을 이겨낸 건 더 큰 폭력이 아니라 모든 걸 버린 비폭력이었다.

권력의 주변을 서성이던 과거를 더 이상 떠올리고 싶지는 않다. 대신 ‘신분 강등’으로 얻은 ‘지방지 기자’의 시각을 잃지는 말아야겠다고, 이 자리를 빌려 고백한다.

영남일보 사회부 정혜진 기자(junghj@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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