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⑧>"어둠의 터널 지나, 통일의 미래로"

평화뉴스
  • 입력 2004.08.1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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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내기 기자의 8.15행사 참관기>
..."변화된 통일의 흐름, 사회 곳곳에 퍼지길"







지난 14일, 8.15 59돌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향했다. 몇 차례 굵은 빗방울이 내려서일까. 저녁 7시에 도착한 서울 광화문에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경복궁을 거쳐 도착한 광화문네거리에는 이미 전국에서 모여든 인파로 열기가 뜨거웠다. 만여 명의 함성이 빌딩을 흔들었고, 몇 개인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깃발들이 저녁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8.15 59돌 전야제로 통일연대가 준비한 "8.15반전평화 자주통일대회"가 이제 막 시작됐다. 원래 8.15행사는 지난 2001년부터 남북을 오가며 남북공동으로 열렸지만 올해는 8.15를 하루 앞 둔 그때까지도 공동행사는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아니, 무산이 확실했다. 개인적으로 남북이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실망이 매우 컸지만, 이날 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행사 이름에 '남북 공동'이라는 말이 빠졌을 뿐 마음은 함께 있다고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사회자의 진행대로 행사는 순조롭게 펼쳐졌다. 단체 대표들은 통일에 대한 솔직한 마음과 안타까움, 그리고 정부에 대한 과감한 발언도 여과 없이 토해내 참가자들의 공감을 얻었고, 중간중간에 열렸던 문화 공연은 '평화와 통일'에 대한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었다.






통일의 물꼬를 트듯 행사장 곳곳에서 등장해 하나가 되는 사물놀이 공연이 행사장의 흥을 돋웠고, 평양 친구에게 보내지 못하는 수십 통의 편지를 들고 나온 중학생들은 통일이 될 때까지 편지를 쓰겠다며 잔잔한 감동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보름이 넘는 통일대장정에 나섰던 대학생 통일선봉대는 민중가요가 나오기만 하면 앉은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즉석에서 몸짓 공연을 펼쳤다.

하지만 행사 중간에 일부 참가자와 전투경찰 사이에 몸싸움이 일어나기도 했다. 정부에 대한 사회자의 비난이 전경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고, 얼마 안 돼 감정이 격해진 전경과 참가자가 서로를 밀치는 상황이 벌어졌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이 말려 작은 소동으로 끝났지만 현장에서 지켜본 필자는 더없이 안타까웠다.

"싸우는 민주주의가 수동적인 민주주의보다 낫다"고 했던가. 그 싸우는 민주주의는 다음날 파병반대 집회에서도 계속됐다. 전경들의 물대포와 소화기 가스에 맞서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은 물건을 던지고 전경차를 부쉈다. 필자에게도 물대포가 떨어졌고,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뿌옇고 매스꺼운 연기가 온몸을 감쌌다.

국가는 '합법'이라는 이름아래 '정당한 수단'으로 전경들을 동원한다. 지금은 지난 2000년의 6.15 공동선언 이후 탄압이 약해지고, 집회도 자유롭게 할 수 있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수배와 연행, 폭력이 난무했단다. 물론 본인을 포함해 2000년대 이후 대학이나 사회로 나온 사람들은 그 사실을 뉴스로 보거나 이야기만 들었을 뿐 얼마나 심각한 상황이었는지 겪어보지 않은 이상 알 수 없을 것이다.

김 체칠리아 수녀가 마을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김 체칠리아 수녀가 마을 주민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이날 집회에 참가한 사람 가운데는 전경출신의 사람도 있었다.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의무였던 백골부대 출신인 그도 학생회 활동을 비롯한 단체 활동을 할 때는 반대로 전경들과 싸움을 해야했단다. 생각할수록 아이러니였다.

행사가 끝나고 밤사이 연세대로 이동한 사람들은 노동자, 농민, 학생, 청년 등 단체별로 흩어져 학교 곳곳에서 축제를 벌였다.
밤새 연세대 곳곳에는 연설과 노래, 공연이 계속됐고 사회단체들의 후원 주막은 물론 외부 상인들의 주막도 밤새 시끌벅적했다.

이번 대회에 동행한 사람들은 대구경북통일연대와 대구경북민중연대 범민련남측본부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9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지역에서 사회운동을 맡아왔는데, 대부분 2000년 이후 이런 대규모 행사의 모습이 매우 많이 변했다는 것이다.

6.15공동선언 전인 98, 99년까지도 경찰의 검문검색을 피하기 위해 중앙본부에서 여러가지 루트를 지시 받아 기차와 버스, 지하철 등의 교통수단을 이용해, 몰래 서울로 잠입해야 했는데, 그렇게 집회에 참여한다 해도 마지막에는 전경에 둘러싸여 최루탄과 화염병을 던져야만 했단다.

지금의 대학생들은 대부분 그 이후 세대들로 이렇게 공연이 펼쳐지는 축제 분위기를 당연하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가 마련되기까지 대학생으로, 이후 사회활동가로 10년 가까이 그 길을 걸어 온 사람들에게는 화염병 연기가 아닌 축제 분위기에 휩싸인 요즘의 분위기가 매우 남다를 것이다.

어디 이들 뿐이겠는가, 7,80년대 군사정권 아래서 활동해 온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성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금의 청년들에게 기대하는 것에 비해 과연 지금의 젊은이들은 얼마나 많은 역량을 가지고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밤새 곳곳에서 단체별 행사가 있었던 반면, 한쪽에서는 나이 어린 학생들이 자기들끼리 게임을 즐기기도 했고, 밤새 집회에 참가한 학생들은 다음날 열린 8.15기념 결의대회와 파병반대 시위에서 피곤을 이기지 못해 졸고 있었다. 실제로 경북대에서 학생회 간부를 하고 있는 한 선배는 학생들 사이에 열의가 많이 부족하다며, 예년에는 200여명이 함께 서울을 찾았지만 올해는 50명밖에 오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걱정은 우선 접기로 했다. 몇몇 학생과 이야기해본 결과 이들 나름의 신념도 확고했기 때문이다. 밤을 새서라도 한 달을 걸어서라도 자신들이 하는 말에 귀기울여줬으면 좋겠다는 것,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옳은 일이고, 이 사회에 필요한 일이기 때문에 무리해서라도 해야한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는 해하는 일인데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마지막으로 여건이 된다면 충분히 즐기면서 즐겁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날 연세대를 찾은 사람 가운데는 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직장을 잡은 필자와 같은 대학 선배들도 있었다. 비록 학교를 떠나 사회의 제도권에서 일을 하고 있지만,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맘때면 꼭 행사장을 찾는다고 했다.

지금의 학생들 또한 미래에는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자유로운 집회, 느슨해진 몸싸움 뒤로 사람들의 마음까지 풀리고 느슨해지는 것이 아니라 활동가는 활동가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자신의 자리에서 당당하게 '평화와 통일'의 흐름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 같다.

마치 혈액이 순환하는 것처럼 7,80년대의 대동맥이 90년대의 정맥으로 흐르고, 이제는 자유로운 분위기를 따라 사회 곳곳에 견고한 모세혈관으로 퍼져나가길 바란다.

새내기 기자의 시각에서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나를 포함한 지금의 사람들은 긴 터널의 끝에 서 있는 것 같다. 과거 열사들이 걸어왔던 긴 터널은 분명 어둡고 힘들었겠지만 '평화와 통일'이라는 출구가 선명하게 보이는 터널이었다. 기쁨과 희망에 앞서 지나온 어둠의 시간이 값진 것으로 남을 수 있도록 그 터널의 끝에 서있는 사람들의 과제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한 통행인이 묻는다. “마을까지 멉니까?”
-현자는 대답했다. “걸어가 보세요”

다가오는 광복 60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만드는 길에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지역의 언론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글. 평화뉴스 배선희 기자 pnsun@p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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