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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이 걸어야 할 새로운 삶에 대한 성찰
김두현 /『新生哲學』(윤노빈 저 | 학민사 펴냄 | 2003.6)
2011년 08월 05일 (금) 00:43:29 평화뉴스 pnnews@pn.or.kr

철학이란 무엇일까? 어릴 때 철학이란 대체로 서양사상사의 주요인물을 외우는 것으로 기억된다. 그들이 고민했던 것이 무엇이고 실제 무엇을 주장했는지도 제대로 모른 채 국민윤리 시간에 나오는 고대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중세 철학의 중요인물인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그리고 근대 철학의 데카르트와 베이컨, 헤겔의 이름을 무작정 외웠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와서 변증법적 유물론을 접하면서 무척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철학이 그냥 뜬 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전체적·통일적인 시각을 말하는 것이며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같은 사회적 현상을 두고도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르니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다르고 사회적 존재에 따라 사회적 의식이 다를 수 있음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관은 관념론과 유물론의 대결이고 유물론이 과학적인 인식방법이며 세계를 바꾸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유물론을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서양 철학에 대한 통렬한 비판

 그런데 윤노빈의 新生哲學은 기존의 철학에 대한 시각, 특히 서양철학에 대한 시각을 전복하게 하고 서양철학의 본질에 대해 통렬히 비판한다. 또한 우리철학이 고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이며 그 해답이 어디에 있는지 격정적으로 토로한다.

   
▲ 윤노빈 저| 학민사 | 2003.06.20
 서양의 ‘눈들’은 세계를 어떻게 보았는가? 고대 희랍의 식민지 밀레토스의 자연철학자들에서 비롯된 요소론적 세계관은 오랜 동안 서양철학을 지배하여 왔다. 이는 우주의 원질을 물, 무한정자, 공기, 불과 같은 원소의 이름으로 답하던 고대 자연철학으로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고대 자연철학에서 동사적 자연을 실체적 자연으로서만 파악함으로써 살아 움직이는 자연을 요소적인 것으로 ‘분해’하는 서양논리학의 기본방침이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요소론적 세계관은 명사적 세계관이며 서양철학은 바로 명사적 세계관에 의하여 지배되어 왔다. 

 그런 시각에서 그는 유물론적 세계관 역시 본질적으로 요소론적 세계관이며 서양철학의 역사가 유물론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서양철학의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관념론자들, 피타고라스나 파르메니데스, 플라톤, 안세무스, 버클리, 라이프니츠, 헤겔, 후설, 하이데거, 비트겐슈타인 역시 본질적으로 유물론자로 보고 있다.

그는 관념론자가 실제에 있어서는 관념을 물체화 시켰다고 본다. 다시 말해 관념론자가 겉으로는 유물론을 부정하면서 실은 유물론자들이 사용하는 요소론적 무기를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수는 바로 물질적 수이며,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땅덩어리와 같은 물질, 플라톤의 이데아도 정신적 물질이며, 버클리의 신이나 마음도 거울과 같은 물체요, 헤겔의 정신도 거대한 엔진과 같은 물체였으며, 후설의 본질이나 형상도 삼각형 모양과 같은 물체요 비트겐슈타인의 문장 역시 원자와 같은 물체였다는 것이다.

 서양철학의 본질은 분단과 포섭

 윤노빈은 서양의 철학이 움직이는 세계로부터 ‘운동’의 개념을 박탈함으로써 세계를 소유하며 세계를 사유하려는 야심을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다. 자연철학자들이 수립한 요소론적 세계관은 그 근본구조에 있어서 정치적 지배자의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분단시키고 통치하라!”(Divide et impera!)는 고전적 지배요령이 서양논리학의 영역에서도 “구분하고 포섭하라!” 또는 “양분하고 종합하라!”는 말로 바뀌어 통용되어 왔다고 본다. 다시 말해 ‘양분법적 수직논리’, ‘포섭적 수직논리’, ‘변증법적 수직논리’속에 이미 분리 또는 분단과 포섭, 또는 지배의 수직적 구조가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학파의 10 쌍 대립개념은 양분법적 수직논리를 대표하며 변증법적 수직논리에서 양분법적 수직논리와 변증법적 수직논리를 완성된다고 본다. 그는 변증법적 모순논리는 기초논리였던 양분법적 수직논리가 불평등한 인간관계에 기초해 있다는데서 민족들 사이의 ‘불화’의 씨를 잉태하고 있다고 본다. 양분법적 분단논리, 포섭적 지배논리의 완성 형태인 변증법적 모순논리의 현실적 구체화는 오늘날 지구상에 생존하는 여러‘ 분단국가들’의 허리를 끊는 분계선들로 표현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의 분계선이야말로 가장 표독스런 서양 양분법 논리의 칼이 되어 있다고 윤노빈은 분석한다.

 이런 서양철학이 그들이 만들어 놓은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철학을 가져야 할까?

 철학의 출발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

  철학의 관심사는 생각 자체가 아니라 고민에 부딪치고 있는 사람의 생존이어야 하며 철학의 출발은 눈을 감고하는 명상이 아니라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고통이어야 한다고 윤노빈은 주장한다. 그래서 윤노빈에게서 철학은 서재 또는 강의실 안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피와 땀과 한숨이 뒤범벅된 사람들의 생존현장에서 탄생하며 잉크로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피와 땀에 의해 기록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땅히 그에게 있어 철학이 문제 삼아야 할 고통은 큰 고통이며 철학자는 민중보다 앞서서 먼저 고통을 자각하며, 민중보다 나중에 기쁨을 맛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철학의 과제는 큰 고통에 관한 인식이며, 큰 고통을 해결하는 것이 철학의 목표이다.

 그렇다면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그는 현존하는 인류의 고통은 민족적 고통에 집약되어 있다고 보고 있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사람이 체험한 최대의 유적자각은 ‘민족’으로서의 자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이 책을 썼던 시기는 1970년대 중반이기에 세계화된 지금은 인류로서의 자각을 가지고 풀어야할 인류적 고통도 철학의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한국의 경우 그가 이 책을 썼을 당시인 1970년대 중반으로부터 40여년이 흘러오고 있지만 여전히 민족적 고통이 해결되지 못하고 있기에 한국철학이 한국이 안고 있는 민족적 고통의 문제를 탐구대상으로 하여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철학전문가’들이 한국적 고통, 인류의 고통과 그 해결에 대하여 외면해 왔으며 심지어 주인이 사용하는 정의, 주인이 고정시킨 개념, 주인이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결론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여 주인이 명령한 문제를 주인의 의사에 따라 눈치를 보아가며 풀어오는 노예의 신세였다고 질타하고 있다.

 민족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사상


 윤노빈은 말한다. 인간의 모든 고통은 이 분열로 만들어졌다고. 사람과 사람을 분열시키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당연히 고통의 해결은 통일의 달성으로써 가능하다. 민족의 분열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고통의 원인인 분열을 시켜놓은 악마와 대적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이 필요한가? 윤노빈은 인식의 확장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한울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한울님을 알기 위해서는 인식의 확장을 해야 하며 생존의 확장을 해야 한다. 즉 자기 밖으로 나올 수 있는 용기, 거짓과 위선에 저항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며 밖으로 나와 함께 손을 잡고 '앞으로' 뛰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함께 앞으로 뛰어나감. 이것이 윤노빈에게는 초월이다. 인간이 자기에서부터 초월되어 큰 우리가 되는 것, 그것이 큰-한, 우리-울, 높은 사람-님, 즉 한울님이 되는 것이다.

윤노빈은 서양철학이 세계를 공간으로 이해하여 인간을 분해하고 자연을 분해, 분석하는 요소론적 세계관(세상은 여러 기계부품 요소들로 만들어졌다는 세계관)이라고 보고 신생철학을 주장한다. 신생철학은 신 - 생철학으로도 읽을 수 있는데  살아가는 것, 시간에 바탕을 둔, 행위하는 존재들에 대한 생동적인 철학을 의미한다. 윤노빈은 이 같은 사고를 우리민족이 제국주의 침탈에 맞서 일어났던 동학에서 찾고 있다.

 인류의 사상혁명과 인내천(人乃天)

 윤노빈은 인류가 지금까지 세 번의 사상혁명을 거쳤다고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신화적 세계에 있던 에게해 문명(그리스문명=희랍문명)을 이성적 사로로 변화시킨 로고스 혁명이다. 이 로고스 혁명은 기원전 6세기 경 아시아의 서쪽 끝인 터키이스탄불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정신적 혁명이다.

두 번째는 파토스적 혁명, 즉 예수의 박애정신으로 인한 혁명이다. 파토스라는 것은 로고스와 대비되어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것을 말한다.  물질을 둘러싼 아수라 같은 전쟁의 고대사를 끝내고 중세로 들어가게 만든 혁명이라고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혁명이 아시아의 동쪽 끝, 바로 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인내천 혁명(사람이 한울이다 혁명)이라고 보고 있다. 그는 인내천 사상이 전통적 동양사상의 최첨단에서 탄생한 것인 동시에 로고스적 殺人機를 능가한 活人機로서 등장한 것이며, 예수의 가면을 쓰고 들어온 위선적 사랑을 능가하는 보편적 공경의 도리로서 등장하였다고 보고 있다.

그는 세계사적 사상의 혁명이 이 땅에서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혁명의 위대성을 모르고 살고 있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인내천 혁명의 위대성을 자각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들이 너무 가까이 인내천 사상 속에 살면서도 또 너무 인내천 사상과는 동떨어진 현실 속에서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위대한 한울님은 매우 먼 곳에 계시다는 그릇된 생각과 위대한 진리는 매우 먼 나라에 있을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이 지배하기 때문에 이 사상의 위대성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인간분할 또는 민족분단의 비극이 오늘날 人乃天의 이상과 양립할 수 없는 人乃踐의 현실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人乃天의 복음을 들려주어도 소귀에 경 읽기라는 것이다.

그는 한민족의 통일은 가장 천대받는 인간성을 가장 숭고한 인간성으로 바꾸어 놓는 과업으로써만 달성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민족통일은 인내천 혁명이며 인내천 혁명은 민족통일이라고 주장한다. 인내천 사상으로 남북이 단결하여 스스로 통일하게 되면 한민족은 ‘有形川’으로서 ‘전 인류의 씨앗’으로서 지구에 그 씨를 퍼뜨려 전 세계를 인내천의 신인간으로 채울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또 하나의 반쪽으로 떠난 윤노빈

   
▲ 윤노빈 / 사진 출처. 한겨레(07.2.8)
신생철학을 쓴 윤노빈은 누구일까? 생소한 이름이다. 그는 일찍이 70년대 중반에 「한국사상」에 「동학의 세계사상적 의미」발표한 바 있다.  김지하 시인의 서울대 동기생으로 독일프랑크프르트대학에서 철학박사를 받고 부산대에서 인문대 철학과 부교수로 역임하던 중  1983년 대만에 유학차 갔다가 가족 모두와 함께 ‘또 하나의 반쪽’으로 택해 사라진 인물.

1983년은 신군부인 전두환 군사독재의 폭압체제가 절정에 달해 매스컴에도 보도되지 않아 그가 월북한 것 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다. 월북한 후 그는 소문에 의하면 대남방송의 기사작성자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어쩌면 그가 신생철학에서 이야기했듯이 민족의 고통인 분단의 해결의 실마리를 찾고자 월북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왜 월북했는지는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91년 북의 사회과학원 초청으로 방북한 송두율 교수에게 그는 현재 북에 튼튼하게 그의 삶의 뿌리를 내렸다고 이야기를 건넸다고 한다.

그의 신생철학은 묵시록처럼 매우 압축적이며 선언적이다.

눈은 ‘가두어 본다’. 눈은 우상숭배의 예술가다. 눈은 ‘마주쳐 본다. 눈은 반복의 원천이다.
 
지배한다는 것은 한계지움에서 비롯된다. 어디에다 한계를 지우는가? 언어에다 한계를 지워놓는것이다. 즉 정의된 내용에다 감금시켜 버리는 것이다.

기억을 가진 자가 강자다. 기억은 강자의 재산이다.

인간에 대하여 지식은 치명적이다. 지식은 자신을 구원해 주는 수술의 칼일 수도 있으며, 남의 목숨과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악마의 칼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람의 생명은 공유다. 생존은 공존이다.
 
사람이 만든 사회제도란 바로 악수이며 팔짱이며 어깨동무의 체계적 직물이다. 


 그가 써놓고 간 묵시록적 철학책 「신생철학」은 결코 일반적인 의미에서 학술적이거나 논리적이지 않다. 어떻게 보면 매우 거칠고 격정적이다. 하지만 본질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핵심을 압축하고 있다. 그래서이다. 그의 눈으로 본 북의 모습은 어떠하며 과연 남과 북의 분열을 메우고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철학은 풍부해졌는지 그를 만나 힘차게 ‘물음표’의 칼날을 들이대고 싶다. 여전히 아직도 우리사회에는 우리민족의 문제를 남의 민족에 가서 해답을 구걸하는 질정관의 태도를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책 속의 길] 29
김두현 / 평화뉴스 객원기자.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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