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1951~2024) '학전' 대표이사가 지난 21일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공연 제작자이자, 연출가이자, 시인이자, 극단 대표이자, 노동운동가였던 고인. '청년 저항 상징', '한국 포크 음악 거목', '민중음악 선구자' 등 그에게 따라붙은 수식어는 참으로 많았다.
세상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세대를 막론하고 영원한 송가인 그의 노래가 거리에 울려퍼졌다.
긴 밤 진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아침이슬>
모두 김민기 작사·작곡이다. 소박한 음율과 단정한 우리말이 아픈 마음을 어루만졌다. 1970년~1980년대 엄혹한 군사독재 정부 시절 노동운동을 하던 김민기가 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에 부른 축가로 만든 노래인 '상록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며 폐병에 걸린 노동자들을 위해 만든 노래 '공장의 불빛' 등.
가장 낮고 가장 여리고 가장 어두운 곳에서 노래는 스스로 힘을 발휘했다. 사람들의 입을 타고 전해진 노래들은 독재정부를 견디는 힘이 되었다. 하지만 '금지곡'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김민기의 노래는 고인의 뜻과는 상관 없이 의도치 않게 '투쟁의 노래', '저항의 노래'가 됐다.
저들의 푸르른 솔잎을 보라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쳐도
온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상록수>
인생 2막은 서울 대학로의 상징인 소극장 학전을 설립하면서다. 황정민, 설경구, 장현성, 이정은, 조승우 등 충무로를 이끈 700여명의 배우들과 가수들이 학전을 통해 배출됐다.
소시민, 노동자, 실직자, 깡패, 잡상인, 가출소녀 등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이야기를 다룬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을 제작해 4,257회 공연이라는 한국 뮤지컬 역사상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최초로 개런티 계약을 도입해 공연 수입을 평등하게 나눈 것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어린이들을 위한 동요도 만들었다. '백구', '작은 연못', '식구 생각' 등이 대표적이다. 창작 뮤지컬 '개똥이', '아빠 얼굴 예쁘네요', '고추장 떡볶이' 등 어린이들을 위한 창작 뮤지컬과 어린이극도 여러편 제작했다.
고인의 모든 예술적 무대가 되었던 학전이 경영상 어려움으로 폐업 위기에 놓였을 때에는 후원과 광고를 거절한 것도 유명하다. 그 탓에 학전은 올해 3월 운영 33년 만에 폐업했다. 학전도 김민기도 사라졌다.
예쁘게 빛나던 불빛
공장의 불빛
온데 간데도 없고
희뿌연 작업등만
이대론 못돌아 가지
그리운 고향마을
춥고 지친 밤
여기는 또 다른 고향
<공장의 불빛>
◆ 하지만 그 탓일까. 모두 '앞것'이 되려는 시대 '뒷것'을 자처한 이에 대한 추모 열기가 식지 않고 있다.
대구지역에서도 고(故) 김민기를 추모하는 행사가 다음달 열린다.
아침이슬, 상록수 등 고인의 대표적인 노래들을 함께 부르며 그와 작별한다.
'한국문화분권연구소(소장 김용락)'는 오는 8월 7일 오후 7시 중구 국채보상로에 있는 '쎄라비 음악다방'에서 '떠난 뒷것을 그리워하며'를 주제로 '김민기 노래 함께 부르기 행사'를 연다고 30일 밝혔다.
이 단체는 "우리 시대의 아픔과 함께했던 김민기라는 인물에 대한 작은 예의 차원에서 행사를 열게 됐다"며 "특별하거나 거창하지 않다. 조촐한 제를 올린다는 마음으로 소박한 작별 행사를 연다"고 설명했다. 이어 "오시고 싶은 시민 누구나 오셔서 그의 노래를 부르며 김민기를 추모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고인과 대구의 인연은 고(故) 김광석 가수로 이어진다. '김광석추모사업회' 회장이 김민기다. 고인은 생전 대구 중구 방천시장에 있는 '김광석 거리'를 찾아 김광석 추모사업을 주도하기도 했다.
검푸른 바닷가에 비가 내리면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물이오
그 깊은 바다속에 고요히 잠기면
무엇이 산것이고 무엇이 죽었소
눈앞에 떠오른 친구의 모습
흩날리는 꽃잎위에 어른거리고
저멀리 들리는 친구의 음성
달리는 기차바퀴가 대답하려나
<친구>
◆ 앞서 22일 학전은 '드리는 말씀'을 통해 "김민기 대표님께서 73세로 별세했음을 알린다"고 밝혔다.
이어 "김 대표님은 지난해 가을 위암 진단을 받았다"면서 "건강 악화와 경영난으로 공연장을 더 이상 운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올해 3월 15일 학전블루 소극장의 문을 닫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학전의 레퍼토리를 다시 무대에 올리겠다는 강한 의지로 투병해 왔다"며 "한평생 좋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나고자 최선을 다해 노력한 고인의 명복을 빌어달라"고 호소했다.
유족들은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렀다. 고인은 천안공원묘원에 영면에 들었다. 유족은 지난 29일 "고인의 뜻에 따라 그의 이름을 딴 어떤 추모사업도 원치 않는다"는 입장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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