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보기

일본 바다에 잠든 강제징용 조선 노동자 136명...'장생탄광' 83년 만에 유해발굴 현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르포] 1942년 야마구치현 우베 
TK 73명 등 조선인 136명 동원
모두 183명 갱도 붕괴 수몰사고 
일본 정부 외면→시민단체 펀딩
잠수부들 1.31~2.2일 수중 조사
"유해발굴 못해...계속 추가 작업" 
추모제 유족·정부·정치권 350명 
한국 추모단 94명 현장에 방문 
민주당 '진상규명 결의안' 첫 발의 
"역사의 아픔, 빨리 고국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한겨울. 지난 2월 1일 오후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에 한국인과 일본인 350여명이 모였다. 

1942년 2월 3일 해저 갱도가 무너져 183명이 숨진 장생탄광(長生炭鑛.조세이탄광) 수몰사고 현장이다. 

당시 탄광으로 끌려간 조선인 일제 강제징용노동자 136명과 일본 노동자 등 183명이 무너진 갱도 속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대구경북에서 끌려간 강제징용노동자도 73명이나 포함됐다. 

장생탄광이 있었던 곳은 이제는 아무런 흔적이 없다. 바다 밖으로 삐져나온 배기·배수구 이른바 '피아(콘크리트 구조물)' 2개가 과거 장생탄광의 존재를 알릴 뿐이다. 희생자들과 바다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해안가 바다에서 보이는 장생탄광의 피아 구조물 2개(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해안가 바다에서 보이는 장생탄광의 피아 구조물 2개(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장생탄광 3차 유해발굴 현장에 3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장생탄광 3차 유해발굴 현장에 35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장대비와 추위 속에서도 무너진 갱도 입구(갱구)에 세워놓은 목조 지지대 앞에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몰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등 '아리랑'과 '고향의 봄' 등을 함께 부르며 먼 세월을 돌아 이제는 가족들의 품으로, 고향으로 희생자들의 넋이 돌아오길 기원했다.  

◆ 일본 바다에 83년간 잠든 조선 노동자 136명

    105분의 갱도 잠수...고향으로 돌아오는 먼 길

일본 장생탄광 수몰사고 83년 만에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유해를 찾는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장생탄광의 몰비상(수몰사고)을 역사에 새기는회(長生炭鉱の水非常.새기는회.이노우에 요코 공동대표)'는 지난 1일 오후 우베시 장생탄광 수몰사고 현장 입구 가로 2.2m, 높이 1.6m 갱구에서 제3차 유해발굴 작업을 펼쳤다. 

이들은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1,000만여엔(우리 돈 1억여원)의 성금을 모아 지난해 10월 1차 유해발굴에 나섰다. 이번이 3차 조사다. 바다 속에 탄광이 있어 잠수부를 섭외해 어려운 조사 작업을 펼치고 있다. 

갱도의 입구에서 105분간의 수중 유해발굴 작업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오는 잠수부 이사지 요시타카씨의 모습(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도의 입구에서 105분간의 수중 유해발굴 작업을 마치고 물 밖으로 나오는 잠수부 이사지 요시타카씨의 모습(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구 밖으로 나와 잠수복과 산소통을 벗고 언론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잠수부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구 밖으로 나와 잠수복과 산소통을 벗고 언론으로부터 질문을 받는 잠수부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이날 1회에 105분 잠수한 이사지 요시타카(伊佐治佳孝)씨는 물 밖으로 나와 잠수 조사 보고를 했다. 바다와 육지를 잇는 생명줄과 어시스턴트(보조) 잠수부 도움을 받아 손으로 더듬는 어려운 작업을 하고 있다.

이사지씨는 "1월 31일까지 나아간 거리(잠수)는 갱도 안 약 250m였다"며 "2월 1일은 거기서 15m 정도 전진을 했다"고 밝혔다. 또 "갱도가 무너졌을 수도 있고, 이 경우 옆길을 찾게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유골이 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은 갱구에서 약 350m 거리로 추정한다"면서 "갱도 중 가장 낮은 곳이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직 85m 정도는 더 나아가야(잠수) 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중에 구조물이 많아 마치 정글짐을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는 말도 남겼다. 

3차 유해발굴은 2일까지 계속된다. 위험한 수중 작업인 탓에 잠수부들은 번갈아 물 속으로 들어간다. 이날 발굴 현장에는 장생탄광 한일 유족들을 포함해 시민단체, 정치권, 정부 인사, 취재진 등이 참석했다. 

◆ 추모비 앞 한 자리 모인 한일 유족, 시민사회, 정치권        

    "광복 80년·수교 60년?...유해발굴 없다면 미래 없다"

새기는회는 이날 오전 11시 희생자 추모비가 있는 우베시 '장생탄광 희생자 추도광장'에서 추모제도진행했다. '일본장생탄광 희생자 대한민국 유족회', 일본 장생탄광 유족회 가족들이 추모제에 참석했다. 김민재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차관보, 강호증 주히로시마 대한민국 총영사, 강창헌 재일본대한민국국민단 야마구치현지방본부 단장, 리수복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야마구치현본부 상임위원장 등을 포함해 더불어민주당 김준혁 국회의원, 후쿠시마 미즈호·코이케 아키라 참의원 등 한일 정치인들도 자리했다.

우베시 '장생탄광 희생자 추도광장'에서 열린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모제에서 유족들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다. 추모비에는 수몰사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우베시 '장생탄광 희생자 추도광장'에서 열린 탄광 수몰사고 희생자 추모제에서 유족들이 엎드려 절을 하고 있다. 추모비에는 수몰사고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왼쪽부터)이노우에 요코 새기는회 공동대표, 양현 대한민국 유족회 회장, 김민재 행안부 차관보, 김준혁 민주당 국회의원, 최봉태 변호사가 추모제에서 장생탄광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사를 한 뒤 각자 입장을 밝히고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왼쪽부터)이노우에 요코 새기는회 공동대표, 양현 대한민국 유족회 회장, 김민재 행안부 차관보, 김준혁 민주당 국회의원, 최봉태 변호사가 추모제에서 장생탄광 희생자들에 대한 추도사를 한 뒤 각자 입장을 밝히고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이노우에 요코 새기는회 공동대표는 추모사에서 "일본 전쟁으로 희생된 유해 183구가 장생탄광 이곳에도 83년째 방치된 채로 있다"며 "'해저에 있어 위치와 깊이를 알수 없어 조사가 어렵다'는 일본 정부 등의 냉혹한 정치를 누가 납득하겠냐. 갱도 안에는 구출을 기다리는 유골이 반드시 있다"고 주장했다. 때문에 "우리는 시민의 힘으로 갱구를 열었고, 잠수 조사에 나서게 됐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의 해인 올해, 일본에 이 유골들을 그대로 방치한채로는 미래 지향적인 한일 관계는 없다"면서 "희생자 유골이 유족 품에 안겨 고향으로 돌아가고, 일본이 식민지 잘못을 밝히는 것은 한일 신뢰와 우정을 쌓는 일이다.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마음을 하나로 이어달라"고 촉구했다.  

양현 대한민국 유족회 회장은 "올해는 광복 8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지만 희생자들은 차디찬 바다에서 고향을 애타게 그리고 있다"며 "가뜩이나 어두운 역사로 고통받은 유족들은 최근 양국 정부의 무책임한 일처리로 인해 더욱 절망을 느낀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시민단체 힘으로 발굴이 시작됐지만, 기술과 예산 부족으로 어려움이 크다"면서 "결국 일본 정부 주도하에 진행되지 않으면 성공이 불가능하다. 일본 정부는 역사적 사실을 인정해 유해발굴과 수습, 고향 땅 봉안에 힘을 실어달라"고 요구했다. 

"아버지, 저희들이 오늘도 왔습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저희들 마음은 비통할 뿐입니다" 장생탄광 추도광장 벽면에 설치된 유족의 추모시(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아버지, 저희들이 오늘도 왔습니다. 지하에 계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저희들 마음은 비통할 뿐입니다" 장생탄광 추도광장 벽면에 설치된 유족의 추모시(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구도 미래도 열자" 한일 청소년단 학생들이 추모제에서 피켕팅을 하고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구도 미래도 열자" 한일 청소년단 학생들이 추모제에서 피켕팅을 하고 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김민재 행안부 차관보는 "갱도 내 탐사를 통해 유해를 찾는 기적이 이뤄지길 희망한다"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희생자들 유해를 하루 빨리 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행안부는 과거사관련업무지원단 산하에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지원과'에서 장생탄광 등 일제 시대 강제징용노동자들에 대한 진상규명과 지원 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이날 추모제에 참석한 민주당 김준혁(경기도 수원정) 국회의원은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너무 늦게 찾아왔다"며 "매서운 바다에서 편히 쉬지 못하는 고통을 잘 알지 못했다. 역사에 무지했다"고 고백했다. 또 "여기 모인 우리가 당신들을 절대로 잊지 않고, 유해를 발굴하고 봉환되는데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원은 지난 1월 12일 '장생탄광 수물사고 진상규명과 희생자 유해발굴 및 봉환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는 결의안'을 국회에 대표 발의했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수몰사고의 진상규명을 밝히고, 유해발굴 작업을 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내용이다. 장생탄광과 관련한 대한민국 국회 내 첫 결의안이다. 

◆ 10대~80대 시민 94명 '한국추모단' 일본 현장 방문   

    "전쟁·징용 역사의 아픔 반복 안돼...고국의 품으로" 

3차 발굴 일정에는 한국 시민들도 함께했다. 대구경북을 비롯해 전국에서 모인 10대~80대 각 분야의 시민 94명은 '장생탄광 한국추모단(단장 조덕호)'을 꾸려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일까지 현장을 방문했다.

갱구(갱도의 입구)의 콘크리트...장생탄광 수몰지구 현장에서 드러낸 갱구 콘크리트 잔재들을 유해발굴 현장 인근에 쌓아놨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갱구(갱도의 입구)의 콘크리트...장생탄광 수몰지구 현장에서 드러낸 갱구 콘크리트 잔재들을 유해발굴 현장 인근에 쌓아놨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전범기업 일본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일제 강제징용노동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을 최초로 인정 받은 최봉태 변호사 등 여러 인사들이 추모단 이름으로 장생탄광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한일 청소년단도 희생자 이름을 낭독하며 추모 피케팅을 했다. 중현 스님과 무용가 박정희, 시인 조기현씨는 추모 공연을 펼쳤다. 국화 꽃을 헌화하거나 술을 따르며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시간도 가졌다.

최봉태 변호사는 "수몰 희생자들을 83년째 바다에 내버려두고 광복 80주년, 한일수교 60년이라고 말해서는 의미가 없다"며 "지금도 너무 늦었다. 이제는 반드시 발굴해내도록 양 정부가 나서라"고 촉구했다. 

◆ '장생탄광' 전쟁물자 채굴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

     구타·린치 끝내 수몰사...일본 정부 은폐, 시민사회가 나서 발굴

장생탄광 수몰사고는 1942년 2월 3일 우베시 해안가 작은 탄광 마을 도코나미쵸 반농반어의 시골마을에서 발생했다. 당시 희생자 183명 중 136명은 전쟁물자 채굴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다. 

장생탄광 한국추모단, 대구사회연구소, 대구경북학회 등 94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제3차 일본 장생탄광 강제연행 조선인 유해발굴단' 이들은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월까지 일본 현지에서 탐사를 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장생탄광 한국추모단, 대구사회연구소, 대구경북학회 등 94명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제3차 일본 장생탄광 강제연행 조선인 유해발굴단' 이들은 지난 1월 31일부터 2월 2월까지 일본 현지에서 탐사를 했다.(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일본 장생탄광 유해발굴 현장에서 추모 공연을 펼치고 있는 박정희 무용가(2025.2.1) / 사진.평화뉴스 김영화 기자

일본 제국주의가 "석탄을 최대로 출탄하라"고 지시하면서 사업주는 30m 전후 얕은 해저까지 석탄을 채굴했다. 법률 위반이다. 1939년부터 강제연행된 이들은 값싼 인력으로 노동탄압을 당하며 채굴했다. 

이 과정에서 갱도 버팀목인 탄주를 불법으로 제거하며 갱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침수가 되며 갱도는 완전히 바닷물에 잠겼다. 그렇게 183명은 장생탄광 깊은 해저 안에서 삶을 마감했다. 

희생자들이 남긴 기록물을 보면 조선 노동자들은 당시 탄광에서 도망을 가다가 잡혀서 린치를 당했다. 구타를 당하다 숨지는 이도 있었다.(노동자 증언 김경봉, 희생자 김원달씨 가족에게 보낸 편지 중) "반드시 탈출해 어머니 곁으로 돌아갑니다"라는 희생자들의 소망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사고 발생 이후 당시 일본 정부와 탄광 소유 회사는 갱도를 폐쇄하고 은폐했다. 일본 정부와 회사 모두 80년이 넘는 현재까지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해를 수습하지 않았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이후 일본 시민들은 1991년 '새기는회'를 만들어 정부가 손놓은 유해발굴 목소리를 냈다. 펀딩을 통해 지난해 첫 수중 탐사를 했다. 유해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바다 갱도에서 계속 조사를 이어갈 방침이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가치를 생각하는 대안언론, 평화뉴스 후원인이 되어 주세요. <후원 안내>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