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2025년 일본 원폭투하피폭 80년을 맞아 조선인 피폭자 1세와 2,3,4세 고통을 세계에 알리고 핵무기 철폐를 염원하는 평화의 기운을 전하기 위하여 원폭 투하 당사국인 미국을 방문하는 방미증언단 행사가 있었다.
2월 17일에 비롯하여 3월 9일까지 태평양에서 대서양 연안까지 여러 도시를 방문하여 미국 시민들과 한국교포들을 만나서 증언을 하고, 연설을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대화를 나누는 짧지 않은 여정의 행사였다.
공식 명칭은 "피폭 80주년 조선인 피폭자의 대를 이은 고통을 알리는 방미증언단 활동"이다.
피폭 1세인 92세 여성 박정순님, 피폭2세인 그녀의 딸 김규리님,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회장으로서 헌신적 활동을 하고 있고 25년 일본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의 노벨평화상 수상식에 초대되어 함께 오슬로 시상식에 참가한 피폭2세 이태재님이 직접 피해 당사자이다. 그리고 국내와 미주, 유럽, 일본 등에서 평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함께 하여 기행단이 구성되었다.
3월 초에는 '평화와통일을여는사람들(평통사)' 회원들 10여명과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심진태 합천원폭자료관 관장(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님이 당사자 자격으로 뉴욕에서 열린 핵무기금지조약(TPNW) 당사국회의에 참가하면서 증언활동에 함께 하였다. 당사국회의에 한국에서는 방미증언단 일행과 평통사, 참여연대 평화군축센터가 참여하였다.
미국 아칸소주 근처 작은 마을 '아일릉귀나' 피폭자들과 후손들
나의 첫날 일정은 2월 25일 화요일 아칸소주 아칸자스시 근처의 스프링데일이라는 조그만 마을 방문으로 비롯되었다. 장장 40시간에 걸쳐 3대의 비행기를 번갈아 타고 아칸소주 공항에 도착한다. 뉴욕에서 합류한 베를린 유학생 이승주님과 함께 하는 여정이었다. 우선 아칸소주 스프링데일에 있는 남태평양 마샬제도 피폭자들 이주공동체를 방문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땅을 "아일릉귀나"라고 부른다. 강력하고 뚜렷한 주관을 가진 반식민주의자 이승주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핵피해를 당한 약소민족의 사람들을 서구 제국주의 국가가 자기들 마음대로 붙인 영어식 이름이 아니라 그들 겨레가 쓰던 본래의 말로 이름을 부르기로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아일릉귀나 사람 뿐 아니라 이어서 만난 모든 약소민족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원칙이 되었다. 그들에게는 자긍심을 주고 쌍방에게 연대감을 심어주는 말 씀씀이였다.
우리는 아일릉귀나 피폭자 및 그 후손들이 사는 스프링데일 이주 공동체 공간을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었다.. 스프링데일에 아일릉귀나 출신 이민자들이 2만명 이상, 미국 전체에 8만명 가량, 핵오염으로 고통받는 아일릉귀나 본토에 4만명 가량 산다고 한다.
다음날 오전에는 아일릉귀나 아칸소주 영사 초대로 대화의 시간을 가지고 점심을 같이 하였다. 오후 5시 무렵 양쪽 사람들 30여명이 모여 피폭자 증언행사를 하였다. 92세 된 박정순님이 증언을 하고, 그분의 딸 김규리님, 한국원폭피해자후손회 이태재 회장님이 증언을 하였다.
본행사를 마치고 우리는 아리랑 노래를 부르고, 아일릉귀나 사람도 그들의 노래를 불렀다. 가수이자 현역 축구선수(국가대표)인 매튜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모두가 흥겹게 놀았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주로 아일릉귀나 청년들이었는데, 그들의 지도자는 마셜교육행동(ME{} 대표인 "베네딕 파부아 메디슨"이다. 그는 30세이고 차분하면서 또렷한 태도로 동료들을 잘 이끌고 있었다. 이틀밤에 걸쳐 아일릉귀나 활동가들이 몇사람 함께 하는 저녁 자리를 같이 하였다. 술자리 형식이지만 핵피해 문제, 식민지 문제에 대햐여 깊은 대화가 오고 갔다.
2월 27일 뉴욕에 도착하여 숙소로 들어가면서 뉴욕 일정이 시작되었다. 28일 저녁에 동포들과 저녁밥을 같이 하였다. 뉴욕동포들의 조직으로서 한국 민주주의 운동에 힘을 보태고 있는 미주한인평화재단(KAPF. "카프"로 읽는다.)의 문유성 회장, 김갑송 사무국장이 우리를 접대하였다. 참고로 카프는 일제하 사회주의 항일저항 문학단체인 경향파 그룹의 이름이기도 하다.
다음날 2월 28일, 아침 일찍 김갑송님이 와서 우리를 뉴욕 민권센터라는 공간으로 안내하였다. 광주항쟁 최후의 도피자이자 밀항자로 알려진 윤한봉 선생이 교민들의 힘을 보아 1984년 창립하였다고 한다. 올해가 41주년이다. 윤한봉 선생 이야기는 뉴욕에 있는 동안 여러번 들었다. 몇사람의 말에 의하면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늘 섬기는 자세로 일을 하였으며, 치열하고 헌신적이어서 옆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열성적으로 일하게 만드는 지도자였다고 한다. 귀국하여 오래 살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어 안타까움을 남긴 사람이다.
일본의 '한국원폭 피해자 돕는 시민모임'...해외 피폭자 지원중단 '402호 폐지' 역할
점심을 먹는 자리에 우리 일행 이치바 준코님이 도착하였다. '한국 원폭 피해자를 돕는 시민모임'이라는 일본 단체를 이끌어 오면서 소송과 집회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한국인 피폭자를 위한 지원활동을 헌신적으로 해 온 사람이다. 그는 '한국의 히로시마'라는 책을 써서 합천을 중심으로 한 한국인 피해자들의 현실을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렸고, 피폭 이후 브라질로 이민을 간 일본인을 포함하여 조선인 및 그 후예들이 중심이 된 "해외거주 피폭자에게는 치료비 지원과 건강수당을 줄 수 없다"는 402호 통고를 폐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오후에도 특별히 잡힌 일정이 없어서 시내 구경을 나갔다. 다수는 타임스 스퀘어(Times Square)로 가고, 신준식, 이승주, 성상희는 이승주님의 제안에 따라 급진적 흑인인권 운동가 말콤엑스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말콤엑스는 근원적이고 급진적인 흑인해방을 주장하면서 흑인민권운동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연설을 위한 집회장에서 백인 인종차별주의자의 총격을 받아 사망하였고, 바로 그 암살이 있었던 자리가 우리가 방문한 기념관의 2층이다. 이승주님이 상당한 수준의 반식민지 이론에 기반하여 차분히 자기주장을 하였고, 말콤엑스가 한 유명한 말, "늑대는 처음부터 그 위험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여우는 처음에 평화롭게 다가와서 사람들이 그 위험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결국 당하게 된다. 그래서 늑대보다 여우가 더 위험하다."라는 말을 소개하였다. 외부로 드러나는 인종주의자보다 잘 드러나지 않는 자유주의자들의 인종차별 의식이 더 문제이고 더 위험하다는 말이다.
저녁에는 기행단 단장인 이대수 목사님의 지인으로 민주평통자문회의 뉴욕협의회장을 지낸 양호님의 초대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맛있는 저녁밥을 마치고 제법 먼거리를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세계의 술 등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유쾌한 사람이었다. 녹녹치 않은 뉴욕물가 수준에서 10명이 넘는 사람들의 밥값을 모두 댄 그분의 정성으로 우리는 흐뭇한 저녁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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