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이틀 앞둔 12월 30일 자정을 앞둔 불꺼진 시장.
한겨울 늦은 밤 거리는 텅 비었다. 상인들도 집으로 돌아갔다.
대구 달서구 신당동 와룡시장의 송년은 조용하기만 하다.
시장 한 모퉁이에 한 트럭 포차가 보인다. 트럭 위에는 '우동, 짜장면, 만두'라고 적힌 간판이 있다. 낡고 오래된 노란색 트럭은 세월을 가늠케한다.
트럭이 주차된 앞 작은 가게가 한해의 끝에서 홀로 불을 밝히고 있다.
짜장면, 우동, 만두 3가지 메뉴를 파는 '소문난 우동집'이다.
새벽까지 일하는 사람들, 동네 주민들이 27년 동안 자주 찾는 단골집이다. 송년의 밤에도 소박한 메뉴로 서민들에게 한끼 든든한 밥 한그릇을 제공한다. 심야식당은 오늘도 손님들을 기다린다.
노란색 포차트럭과 함께 한 27년 새벽 시장, 서민들의 밥 한그릇
음식점을 운영하는 이들은 60대 정모씨와 부인이다.
두 부부는 지난 1997년부터 와룡시장 앞 대로변에서 낡은 0.5톤(t) 트럭을 끌고 노점을 운영했다. 가게 앞 세워놓은 노란색 트럭이 새벽까지 문을 연 '포차트럭'의 주인공이다. 포차트럭은 낮에는 볼 수 없었다. 밤 10시에서 새벽 2시까지만 '반짝 영업'으로 올빼미족 손님들에게 사랑 받았다.
27년 간 동거동락한 '포차트럭' 대신 지난 11월 작은 가게를 차려 장사한 지 갓 한 달이 되었다. 이제는 낮부터 영업을 시작해 새벽 2시까지 가게 문을 연다. 그럼에도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노란색 트럭은 마스코트처럼 가게 앞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작은 가게라도 차리게 해 준 게 바로 트럭 덕분이다.
트럭을 끌고 길거리에서 장사를 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은 매년 찾아오는 더위와 추위였다. 실내에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가게와는 달리, 트럭 장사는 매일 팔아야 할 물건들을 펼쳐놓고 관리해야 해서 수고로움은 배가 됐다.
정씨는 "노점에서 장사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며 "더울 때나 추울 때 밖에 있어야 하는 것들이 정말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또 "트럭 장사를 할 때 남들이 보기에는 물건들을 그냥 펼쳐 놓은 것 같아 보이겠지만, 일일이 준비하는 과정도 참으로 고된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트럭이 아닌 실내에서 장사를 할 수 있게 돼 기쁘지만, 월세와 전기세는 새로운 걱정거리가 됐다. 정씨는 "가게를 얻으니 근무 환경도 좋고, 마음이 편하지만, 월세 등 고정 비용이 많이 나가는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한해 끝, 밤 손님들의 새해 소망..."국정 수습, 건강, 일상의 행복"
단골 손님들은 한해의 끝에도 새벽 포차를 찾았다.
그동안 노점에서 음식을 먹으며 추억을 쌓았던 인근 주민들도 정씨 부부가 포차트럭에서 영업했을 당시를 기억했다.
그간 지나온 세월이 알려주듯, 짧게는 2~3년부터 길게는 15년까지 꾸준히 이들 부부의 새벽 포차를 찾는 손님들도 있었다.
15년 단골이라는 40대 주모씨는 "어제도 어묵을 사서 포차를 찾았는데 가게를 오픈한 줄 몰랐다"며 "새 자리를 잡았으니 가게가 더 나은 발전이 있기를 바란다. 올해보다 내년이 더 잘 될 것"이라는 덕담을 했다.
설밑 늦은 밤 소담한 밥상에 앉은 이들은 자신들만의 작은 새해 소망을 밝혔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국 혼란으로 인한 경제 불안 등이 해소되길 바라는 목소리가 많았다. 나라 걱정 않고 먹고 살기 좋은 새해가 되길 바랐다.
포차 사장님은 먼저 "이제 가게를 차렸는데, 장사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이어 "계엄 후로 사람들이 많이 움츠러들어 손님이 많이 줄었다"면서 "정부가 국민을 걱정해야 하는데, 국민이 정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 말이 되냐"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나라만 조용하면 장사가 잘 된다. 정국이 안정돼 서민들과 소상공인들이 나라 걱정을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손님들도 한 목소리로 걱정을 하며 비슷한 새해 소망을 밝혔다. 김모(35)씨는 "비상계엄이 터지고 나서 환율이 급등해 서민들이 많이 힘들 것"이라며 "계엄령 전후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얼른 사태가 수습돼 내년에는 경기가 좋아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밝혔다.
청소업체 직원 60대 여성 정모씨는 "나라가 어떻게 되려 하는지 너무 시끄럽다"며 "물가는 자꾸 올라 서민들이 힘들어진다"고 토로했다. 김정주(68)씨도 "비상계엄 사태가 일어난 뒤 요즘 나오는 정치 뉴스들을 보면 항상 답답하다"면서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나라는 돌아가겠지만, 새해가 지나고도 한동안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탄했다.
가장 많은 이들의 소망은 '건강'이었다. 자신을 포함해 가족 등 주위 사람들이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면서 내년에는 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50대 이모씨는 "나이 들수록 건강이 최고고, 주위 사람들이 아프지 않는 것이 최고로 좋다"고 했고, 이동원(59)씨도 "올해는 건강이 안 좋아져서 걱정"이라며 "내년에는 가족들이 건강하고 잘 되는 것이 다른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40대 주모씨는 "이 시간에 건강하게 앉아서 우동 한 그릇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행복 아니겠나"면서 "내년에도 큰 변함 없이, 큰일 없이 일상 속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소망"이라고 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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