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를 직접 농사 짓고 캐 먹는 노동자들 손을 보세요. 대부분 여성들이에요. 저 주름지고 거친 손. 그런데 얼마전 기사에서 본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이 지난해 1년 동안 받은 배당금만 3,500억원이 넘는 거에요. 이게 공정한 건가요? 3,465억원치 노동을 하지 않고 자본가가 너무 많이 가져가는 거에요.
안숙영(60) 계명대학교 정책대학원 여성학과 교수는 지난달 26일 자신의 연구실에서 이처럼 말했다.
연구실에 걸린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감자를 먹는 사람들'(The Potato Eaters.1885)을 보며 한 말이다. 그는 "우리나라 최저임금은 1만30원(2025년 기준). 특히 여성에게 최저임금은 최고임금입니다. 노동을 통해 부자가 될 수 없는데, 유행어가 '부자되세요'잖아요. 정직하게 노동하고 땀 흘려 감자를 사먹을 수 있어도 돈방석에는 앉지 못하죠. 그런 말을 하는 사회 자체가 폭력이고 모순이죠"
■ 최저임금 못 받는 편의점 아르바이트 노동자에서 나홀로 돌봄노동을 거쳐 소수의 여성 국회의원까지.
계명대 정책대학원 여성학과에서 여성과 관련된 모든 것이 학문의 대상이다. 우리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존재하는 숱한 성(性)차별을 분석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끝없이 연구하고 대안을 모색한다.
계명대 정책대학원 여성학과는 '여성학과'를 단 지방에서의 유일한 대학원이다. 일부 대학에 여성학과, 여성젠더학과가 있지만 대부분 연계 전공, 협동과정으로 석·박사를 공부하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야한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대구지역에서 35년간 여성학과 명맥을 잇고 있는 계명대 대학원 여성학과의 사람들을 지난달 26일 오후 대구 달서구 신당동 달구벌대로에 있는 계명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 계명대(총장 신일희)는 1990년 정책대학원에 여성학과(석사과정)를 개설했다. 2007년에는 계명대 일반대학원 사회학과에서 여성학 전공 박사과정을 도입했다. 여성학의 여러 분야를 깊이 있게 연구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영역에서 성평등주의적 관점을 가진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게 학과 개설 취지다. 개설 초기에는 미래를 이끌 역량 있는 여성 리더를 발굴한다는 포부도 세웠다.
가족 구조의 다양화, 젠더와 섹슈얼리티 구조, 비정규직의 여성화와 노동시장에서의 성차별, 지구화와 시민사회의 공존과 충돌, 기술과학의 발전과 젠더 문제, 환경 등 최근 제기되는 이슈들을 분석하고 정책적 대안을 모색했다. 성차별을 타파하고,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35년간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여성학과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한 학생은 280명이다. 이 가운데 160명이 졸업했다. 박사 과정에는 모두 60명이 입학해 지금까지 모두 7명이 박사학위를 땄다. 이 과에서 배출된 여성학 석·박사는 160여명이다. 지역에서 여성학자들의 산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지난 2003년 5월에는 계명대 특별연구소로 '여성학연구소'를 설립했다. 2008년 3월 부설연구소로 승격됐다. 연구소장은 안숙영 교수가 맡고 있고, 장지은(50) 젠더사회학 박사와 임은경(52) 여성학 박사 등이 전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또 계명대 내 20여개 전공의 교수들이 연구소에서 함께 활동한다.
여성학연구소는 여성문제와 젠더문제에 대한 학제간 연구 기획, 세미나, 콜로키움, 심포지엄 등을 연다. 특히 성평등한 대구경북지역을 만들기 위해 성인지적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기도 한다.
매년 6회의 <계명여성학세미나 (봄학기 3강좌, 가을학기 3강좌>와 1회의 <추계학술대회>, 1회의 <영남여성학포럼>, 6회의 <대학원생콜로키움>을 정기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국의 페미니스트 연구자와 학생들이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고, 공동연구를 하기도 한다.
지난 2023년 5월 26일에는 '지역 X 청년여성의 삶을 모색하다'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2014년 5월 27일에는 '100주년 계명여성학 세미나'를 진행했다. 2024년 10월 25일에는 '전환의 시대, 대구경북지역 여성들의 일과 삶의 현재와 미래'라는 주제로 2024년도 추계학술대회를 개최했다. 또 매년 대구여성영화제도 진행하고 있다. 2023년과 지난해에 이어 2025년 올해도 대구여성영화제를 열 예정이다.
■ 조금 낯선 학문이지만 여성학과에는 성별과 직업에 있어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공부한다. 남성 학생들도 있다. 경찰, 목회자 등 직업도 다양하다. 여성학을 배우는 게 삶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안숙영 교수는 "우리 사회에 사회적 약자라고 할 때 굉장히 많은 범주가 있다"며 "하지만 장애인, 여성, 노인, 노동자 등으로 분류해도 이들이 5대 5의 비율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은 우리 사회의 딱 절반, 5대 5. 이 세상 어디에도 성(性)을 피한 인간은 없다"면서 "그냥 노인과 여성 노인, 그냥 노동자와 여성 노동자, 그냥 장애인과 여성 장애인은 다른 카테고리"라고 설명했다. 이어 "인류 절반이 여성인데 이제는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만 취급하는 담론에서 벗어나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의제로 여성을 연구해야 구조적인 성차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프랑스의 경우에는 '남녀 동수법'이 이미 시행돼 굉장히 빠른 속도로 여성 국회의원과 지방의원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면서 "노동,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어느 분야에서도 여성 없는 분야는 의미가 없다"고 여성학과의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또 "인류 역사에서 노동 분업 중 가장 근본적인 분업은 바로 성별 노동 분업"이라며 자본가와 노동자의 분업 이전에 인류의 출생부터 죽음까지 성별로 강요당하는 성별 노동 분업은 인간의 역사가 존재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노동과 계급을 이야기할 때 모든 성별이 같은 것처럼 우리 사회는 말하지만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들이 처한 상황이 다르다"면서 "최저임금을 못 받는 노동자의 대다수가 여성 노동자라는 것도 예시 중 하나"라고 했다. 때문에 "어느 분야에서든 성별을 이야기하지 않고 말하는 것은 중립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립적이지 않다"며 "사회학, 과학기술학문에도 젠더(Gender)라는 요인의 변수를 집어 넣은 것은 2000년대로 매우 늦다. 때문에 여성학은 더욱 발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고 설명했다.
이어 "학문의 대부분이 성별에 의한 '기울어진 운동장'인데 이제서야 여성학이 이야기되기 시작한 것"이라며 "고대 그리스 철학만 보아도 기본적으로 '여성혐오사'다. 그리고 우리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97~98% 학문은 남성 지식이다. 우리는 고작 1%도 안되는 여성학을 가지고 학문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인류의 절반을 차지하는 여성들의 지식과 경험을 드러내는 것이 우리 학과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 장지은 전임연구원은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고, 재정립하는 것도 여성학문에서 시작한다"며 "우리가 초.중.고에서 배우는 역사는 사실상 '히스토리(History.그의 이야기)'인데, '허스토리(Herstory.그녀의 이야기)는 없지 않나. 이런 것도 성평등한 교과서로 바꾸자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각 분야에서 하고 있다"고 했다. 이어 "그러면에서 여성학과에서 공부를 하게되면 그런 비판적인 사고 인식 능력이 생기고, 좀 더 세상을 성평등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현재 남녀 성갈등이나 저출산 문제 등 국내의 가장 뜨거운 현안들도 여성학에서 다루는 이슈 중 하나다. 그 탓일까 대구경북지역의 여성단체 활동가들 중 계명대 정책대학원 여성학과를 거쳐간 이들이 많다.
임은경 여성학연구소 전임연구원도 병원에서 일하던 베테랑 간호사였다. 부산지역에서 일과 공부를 병행했지만 부산에서 여성학 박사를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 없어 계명대에 와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그 동안 여성주의하고는 담을 쌓은 삶을 살았다"며 "그러나 여초 직장인 병원에서 오히려 여성 차별적인 일들을 직접 보고 겪다보니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여성학을 공부하게 됐다"고 밝혔다.
■ 그러나 최근 35년 명맥이 끊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여성학과 석사 과정이 속한 정책대학원을 폐지하기로 해 여성 학과도 폐과 기로에 섰다. 그 탓에 더 이상의 석사 과정 학생도 받지 않고 있다.
때문에 계명대 여성학연구소와 지역 여성·인권·노동단체, 시민단체, 여성학 연구자들은 지난달부터 오는 5일까지 "계명대 일반대학원 석사 과정 여성학과 개설을 지지"하는 내용의 →온라인 서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온라인 서명지를 통해 "전국의 대학 연구소와 여성학 연구자들은 계명대 일반대학원 여성학과 개설을 강력 지지한다"며 "학문적 발전을 넘어 사회적 공익을 증진하고, 성평등과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발판으로서 젠더 연구와 실천이 더욱 활성화되기를 기대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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