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쬐는 햇빛 아래서 나무에 달린 복숭아를 하나씩 딴다. 이미 옷은 흘러내린 땀과 함께 작업하다 생긴 흙먼지들이 많이 붙어 있었다.
경북 경산시 남천면 금곡리에서 복숭아 농사를 짓는 남산(가명.61)씨다. 남씨는 22일 오전 무성히 자란 수풀을 헤치며 가지치기를 하고, 병에 걸려 썩은 복숭아를 하나하나 골라내고 있었다.
이날 경산시는 낮 최고기온 35도까지 올라 폭염 경보가 내려졌다. 경산시도 이날 오전 11시쯤 "무더운 날씨로 두통, 식욕부진, 집중력 저하, 피로 누적 등 건강 문제를 유발할 수 있으니 불필요한 이동을 피하고 낮 시간대에 쉼터를 적극 활용해달라"는 안전 안내 문자를 보냈다.
◆ '폭염 경보'에도, 농민은 새벽부터 밭으로...풀숲 열기, 긴팔·장화 '땀 범벅'
복숭아 농사를 지은 지 3년 차가 된 남씨는 2,000여평(6,611.6㎡) 규모의 과수원을 혼자 관리한다. 실제로 묘목이 심겨 있는 땅은 1,000평 정도이고, 복숭아나무는 200그루 정도 심겨 있다. 이 중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80~90그루고, 나머지 100여그루는 아직 자라지 않은 묘목이다.
"새벽에 나와 일을 합니다. 오후 11시나 12시쯤 되다 보면 땅에서 열이 올라와 후끈해요. 그래서 집에 들어가 샤워를 해도 한두 시간은 더 쉬어야 다시 나올 수 있습니다“
남씨는 새벽 4시 30분쯤 일어나 오전 11시~12시까지 농장에서 일한다. 복숭아 수확기인 8월에는 쉬는 날조차 없다. 더위를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모자와 얇은 티셔츠를 입었지만 금세 푹 젖었다. 또 이온음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소금물도 매일 들고 다닌다. 팔토시와 고무장화는 열을 배출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착용해야만 한다. 풀에 쓸리거나 벌레에 물리는 것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서다. 푹푹 찌는 날씨에다가 나무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도 농사를 더욱 힘들게 하는 원인이다.
게다가 나무와 풀로 가득한 과수원은 습기까지 더해져 '찜통' 그 자체였다. 복숭아 농장에 잡초가 자라는 것을 막기 위한 제초제를 치지 않는다. 예초기를 돌려 잡초를 제거해야 하는 일까지 해야 하기 때문에 일은 더 많아졌다. 특히 여름에는 다른 계절보다 풀이 더 빨리 자라기 때문에 풀을 베야 하는 주기도 더 빨라졌다. 남씨에게 폭염이 더 힘들게 다가오는 이유다.
남씨는 이날 30분 정도를 일하다 농장 옆에 있는 창고로 들어가 땀을 식혔다. 슬레이트로 만들어진 창고는 에어컨이나 창문이 없어 열기를 배출해내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남씨는 창고 안에서 오래된 듯 덜덜거리는 선풍기를 틀고, 창고 한 켠에 있는 부채를 가져와 부쳤고,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며 땀을 빼냈다.
다행히 폭염 속에 밖에서 일하다 쓰러지거나 더위를 먹은 적은 없다. 다만 여름에는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지기 때문에 햇볕을 쬐는 시간이 길어져 고역이다.
남씨는 "경상북도나 경산시에서 여름에는 가능하면 일하지 말라는 안내 문자도 날아오고 하지만 사실상 소용이 없다"며 "농민들 입장에서는 생업이 달려 있으니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면 또 일이 쌓인다"고 말했다 .이어 "점심을 먹고 나면 샤워를 해도 피로가 몰려온다"면서 "씻고 쉬다가 오후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일한다"고 했다.
◆폭염에 취약한 '농촌'...올해 경북 온열질환 사망자 중 절반이 농민
논밭과 과수원은 특히 폭염에 취약한 곳이다. 올해도 사람들이 논밭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숨지는 사고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기상청이 지난 19일 발표한 '폭염 특별관측 중간 분석 결과'를 보면, 폭염 강도는 밭, 과수원, 논, 그늘 순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질병관리청 온열질환감시체계에 따르면, 지난 5월 15일부터 8월 20일까지 전국 온열질환자는 3,815명이며, 사망자는 23명이다. 경북의 경우 온열질환자가 369명에 추정 사망자 4명으로 경기에 이어 2번째로 많다. 경북도에 22일 확인한 결과, 온열질환 사망자 중 논밭에서 일하다 사망한 이는 2명이다.
봉화에서 지난 6월 29일 밭에 나와 예초 작업을 하던 A(90)씨가 사망했고, 경산시 진량읍 한 논에서도 지난 30일 80대 남성 B씨가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졌다.
◆소규모 농업인들, 재난 같은 폭염에 저임금 생활고 '이중고' 시달려
남씨는 폭염과 저임금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토로했다. 겨울부터 복숭아 농사를 위한 준비를 시작하고, 3월부터 수확을 위한 8월까지 복숭아를 재배한다. 사실상 6개월을 일하는데도 "올해 예상 수입이 300만원이 되면 다행"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더울 때는 넓은 농지를 관리하기 위해 사람이라도 쓰고 싶지만, 남씨와 같은 소규모 농업인들은 재산이 많지 않아 고용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다고 일을 멈출 수는 없다. 하루 수확을 하지 않으면 소득이 감소해 생계비와 자재값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얼마 되지 않는 수입을 메꾸고자 인테리어 목수 일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남씨는 "생계가 달려 있는데, 괜히 여름에 나오겠냐"며 "사람들이 일을 중단해야 되는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이어 "농민들도 생계가 보장되면 견딜 것"이라며 "소농들은 수개월 간 농사에 매달리며 종일 일하고도 대기업 한달 치 월급만 못하다"고 토로했다.
이어 남씨는 폭염 등 날씨에 취약한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통해 최소한의 생계를 국가가 책임져줬으면 한다고 바랐다. 그는 남씨는 "농민들 소득이 보장돼야 좋은 농산물을 생산할 것"이라며 "국가가 농민들이 먹고 살 수 있도록 최소한이라도 기본소득이나 의료 등을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북도는 농민 관련 폭염 대책으로 마을순찰대를 통해 취약 시간대에 순찰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북도 재난관리과 관계자는 "농민들을 위해 폭염 시기에는 마을순찰대와 소방 사이렌, 드론 등을 활용해서 취약 시간대 예방 순찰을 하고 있다"면서 "노인이 대부분인 농민들이 가장 더운 시간대에 밖에서 일하는 것을 줄이기 위해 경로당을 활용해 여러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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