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실종을 우려한다"

평화뉴스
  • 입력 2004.11.0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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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덕률의 시사칼럼 38>
... “색깔론의 야당, 무기력한 여당, 정치력 없는 대통령”

나라가 시끄럽다. 온통 갈등이고 분란이다. 다들 걱정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정치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뽑아 놓은 정치인이 있고 정치하라고 만들어 준 국회의사당도 있지만 정작 중요한 정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갈등과 분란이 해소되고 나라가 안정될 리 만무한 것이다.
정치의 첫째 역할과 과제가 대화와 토론을 통합 국민통합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제 역할을 잘 할 때 갈등은 해소되고 민생은 안정되게 된다. 반면에 정치의 역할에 문제가 생길 때 갈등은 거리와 삶의 현장에서 분출하게 되고 국민은 갈기갈기 찢겨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정치권엔 불행하게도 대화가 없고 토론은 더더욱 없다. 국민통합의 기능은 아예 포기한 것 같다. 정치의 본령이 국민통합이라는 교과서적인 명제를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새겨본 국회의원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지금 국회의사당엔 막말과 싸움만이 판치고 있다. 하기야 언제 제대로 된 정치가 작동됐던 적이 있었겠나마는, 그래도 17대 국회는 좀 다르겠지 하고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온 국민 입장에서는 실망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다.

정치 실종의 일차적 책임은 말할 필요도 없이 국회에 있다.
과거에 정치가 실종됐던 가장 큰 이유는 무소불위의 행정부 권력에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정치인 자신의 책임이 더 크다. 과거 군사정권 때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정보요원들이 야당 정치인을 사찰하고 감시하고 회유하고 협박하면서 정치의 영역을 말살했지만, 지금은 정치인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 자신의 권한과 역할과 의무를 스스로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우선 정치를 사법부에 떠넘기고 있는 야당의 자세가 걱정이다.
당연히 국회 안에서 토론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면서 법과 제도를 만들고 고쳐 가야 할 국회의원들이 툭하면 헌법재판소로 문제를 끌고 가려 한다. 행정수도 이전 위헌 판결에서 불거졌듯이 그 구성과 논리와 식견이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국민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지만, 야당은 한건 재미 봤다고 툭하면 헌재에 기대려 한다.

여기서 신행정수도 건설 특별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위헌판결에 대해 한마디 하자.
신행정수도 건설을 둘러싼 논란의 본질은 신행정수도 건설이 과연 전국민이 고루 잘살게 하고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게 해줄 올바른 정책이냐 아니냐 라는 점에 있다. 당연히 관점과 판단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그 이견들은 당연히 국회에서 해소되어야 했다. 정치적 과정을 통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 갈 정책적 사안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시비비가 엉뚱하게 헌재로 가면서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되었다. 결론은 엉뚱하게도 관습헌법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신행정수도 건설이 국민과 국가를 위해 바른 정책이냐 아니냐는 법관들의 판단 영역이 아니었다. 관습헌법 개념을 들고 나온 것이 맞느냐 안맞느냐 하는 법리 논쟁으로 비화되고 있지만, 그것은 애초 신행정수도 건설의 본질적 쟁점이 아니었던 것이다.
정책적 사안이자 정치력으로 풀어야 할 사안이 사법부로 넘겨지면서 문제의 본질과 쟁점이 엉뚱하게 번져간 것이다. 헌재의 판결이 문제이기 전에 정치적․정책적 사안을 헌재로 끌고 간 무능한 정치권과 정치기능의 마비가 더 문제인 것이다.
이처럼 헌재에 기대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의 포기다. 정치인으로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을 신난 듯이 한다. 끝까지 국회의 울타리 안에서 토론하고 협상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야당, "색깔론, 좌파, 막말의 버릇"... 여당 "구심점 없는 무기력의 극치"
대통령, "정치를 복원하지 않으면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국민을 직접 만나 난국 헤쳐가야"


정치권의 막말도 정치를 마비시키는 중요한 문제다.
토론과 대화를 안하겠다는 듯이, 아예 상대도 않겠다는 투다. 여기서도 야당의 책임이 작지 않다. 툭하면 색깔론이기 때문이다. 좌파로 몰아 수십 년 동안 재미보던 기억을 잊지 못해서 그런 건지, 지난 대선 때 세상 바뀐 것을 뼈저리게 깨닫고서도 여전히 그 버릇 고치지 못하고 있다.
사립학교법 개정안도 좌파 정책이요, 노태우정권 이래 십 수년 계속되어 온 재벌그룹의 출자총액 제한제도도 좌파 정책이란다. 해방직후 당연히 했어야 할, 만시지탄일뿐인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법안도 좌파 법안이며, 국가보안법 폐지는 좌파를 넘어 나라를 김정일에 갖다 바치는 친북 정책이란다. 고교등급제 반대도 좌파며 성매매 금지법안도 좌파란다.
그 정도면 우리 사회는 온통 불그스레하게 보일만 하며 전 세계가 온통 새빨갛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인식을 깔고 대화와 토론에 나설 리 만무하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좌파는 대화와 토론의 상대가 아니라 타도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툭하면 수준 이하의 막말을 쏟아내고 쿠데타를 궁리하게 되는 것도 그런 냉전적 세계관의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대통령 비하 연극이 문제되어 당 대변인이 사과한 적도 있었지만, 색깔론적 사고와 의식을 떨쳐내지 않는 한 그런 막말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은 대화와 토론을 막게 된다. 사사건건 좌파라고 퍼부으면서 막말하는 상대와 토론하자고 마주앉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정치 실종의 더 큰 책임은 마땅히 정부 여당이 져야 한다.
국가 운영의 궁극적인 책임은 정부 여당에 있기 때문이다. 정치의 기능이 마비되고 실종된 것에 대해서도 정부 여당은 무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나 17대 국회는 여당이 다수당이다. 그런데 지금의 여당에게는 덩치에 걸맞는 정치력이 보이질 않는다. 무기력의 극치다. 아무리 초선 의원이 많다고 해도 아마추어들만 모여 있는 것 같다. 구심점도 없어 보인다. 야당과의 대화 창구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일이 잘 안풀린다고 험한 말까지 뱉어낸다. 아무리 상대하기 힘든 야당이라도 정부 여당이 대화와 토론을 포기해선 안된다. 그러기에 국가를 책임진다는 것은 원래 어렵고 힘든 일이다. 여당 노릇 잘하는 것이 야당 노릇 잘 하는 것보다 백배 더 힘든 법이다.

새로운 정당 패러다임이 아직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핑계도 이제는 설득력을 갖기 힘들다. 국민이 불안해하고 못미더워하는 것은 지금의 여당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좀처럼 나아지는 기미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 여당의 이런 시스템으로 상당한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는 개혁 정책을 얼마나 추진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대통령에게도 책임이 크다.
노무현대통령은 탄핵 사태까지 당하고 다시 대통령으로 섰다. 당연히 심기일전해야 한다. 탄핵당했을 때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품었을 법한 분노와 원한, 그리고 그 언저리의 찌꺼기 감정들을 모두 털어내야 한다. 대통령은 그만큼 막중한 자리기 때문이다. 그 위에서 대통령과 청와대도 당연히 정치력을 발휘해야 한다. 내 하는 일이 역사적으로 옳은 일이고 선이기 때문에 야당도 언론도 국민도 모두 따라와야 한다는 식의 내달리기는 안된다. 두루두루 만나서 벽을 헐고 이해를 구하며 지혜를 모아가는 일에 몇 배의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야당이야 일차적으로 여당의 파트너겠지만 시민사회의 각계 인사들과 만나 진지하게 토론하고 설득해서 국민적 합의를 찾아가는 일에는 대통령과 청와대가 나서야 한다.

어려울 때일수록 국민과 직접 만나 국민과 함께 난국을 헤쳐가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것이 지금 대통령과 청와대가 가장 힘써야 할 일이다. 정책과 일로 승부보겠다는 발상은 참신해 보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구도와 저항이 따를 수밖에 없는 일의 성격으로 보아 대단히 나이브한 발상이기도 하다.

지금의 정국 경색과 국가적 혼란의 핵심에는 대통령과 정부와 여당의 정치력과 섬세한 터치의 부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데서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정치를 복원해 내는 일이 먼저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홍덕률(평화뉴스 칼럼니스트. 교수. 대구대 사회학과. drh121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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