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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슬로 선언이란 무엇인가 - 오슬로 협정과 팔레스타인 평화정착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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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서남아시아 전쟁과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 ⑦
- 성상희(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오슬로 선언의 배경

이스라엘은 캠프데이비드 회담에 의한 이집트와의 화해로 어렵게 조성된 중동지역의 평화 분위기를 외면하고 1980∼1981년 기간동안 1967년과 1973년 전쟁에서 점령한 동예루살렘과 가자지구 및 골란고원을 자신의 영토로 공식 합병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1987년 12월 이스라엘의 점령 지역에서 인민봉기(인티파다)가 발생하였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평화회담을 제의하였으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1991년 4월 이를 거부하면서 유엔 감독 하의 국제회의 개최를 제의하였다. 

그 이전에 1988년 11월 5일 팔레스타인 국민의회는 팔레스타인 국가의 독립을 선포하고, 국가수립의 기초로서 유엔결의 242호와 338호를 수용하였다. 이는 사실상 1967년 이전 국경을 경계로 한 팔레스타인 국가에 대한 요구를 철회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실제로 동예루살렘을 포함하여 점령지역의 인구구성은 99%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로 되어 있었다. 1967년 이전 국경 기준으로 이스라엘 영토 내 인구는 80%의 유대인과 15%의 아랍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슬로 선언의 성립과 유명무실화 과정 

인티파다로 높아진 팔레스타인의 국제적 지위가 1990년 발생한 걸프전에서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전략 능력 부재로 인한 사담 후세인 지지와 걸프전쟁 반대 정책으로 인하여 아랍 각국들의 지지를 잃게 되고, 그로 인하여 해방기구의 교섭능력이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와 같은 약화된 해방기구의 상황을 배경으로 미국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는 마드리드 평화회담을 추진하였다. 

1991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해결을 위한 마드리드 평화회담(Madrid Peace Conference)이 개최되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1993년 9월 13일 이스라엘 이츠하크 라빈(Yitzhak Rabin) 총리와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야세르 아라파트(Yasser Arafat) 의장이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에 관한 원칙 선언에 합의, 미국의 백악관에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평화를 위한 역사적인 합의를 이룬 것이다. 이것이 오슬로협정이다. 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이 서로의 합법적인 존재를 인정하는 최초의 합의였다. 이스라엘은 PLO를 팔레스타인을 대표하는 공식적인 기구로 인정하였으며, PLO는 무장투쟁을 중단하기로 약속하고 이스라엘이 평화롭게 살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였다.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이스라엘-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평화 협정에 서명한 후 빌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 사이에 서 있는 가운데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오른쪽)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 Gary Hershorn, Reuters
1993년 9월 13일 워싱턴 백악관에서 이스라엘-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 평화 협정에 서명한 후 빌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그 사이에 서 있는 가운데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오른쪽)이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왼쪽)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 Gary Hershorn, Reuters

오슬로 선언은 2국가 해법에 기반한 평화 프로세스 정착을 위해 체결한 협정이다. 공식적인 명칭은 '임시 자치 협약에 관한 원칙선언(Declaration of Principles on Interim Self-Government Arrangements)'이다. 오슬로협정은 1967년 전쟁 이후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영토에서의 이스라엘 철수를 골자로 하는 UN 안보리 결의안 242호와 1973년 중동전쟁 이후 결의안 242호를 재확인한 UN 안보리 결의안 338호의 내용을 기반으로 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향후 5년 내에 팔레스타인을 통치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Palestine Authority)를 세우는데 합의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조치로서 가자지구 및 예리코 지역에서의 이스라엘군 철수,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대한 이스라엘의 권한 이양,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권한에 관한 내용 등의 조항을 포함하였다. 오슬로협정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공존이라는 2국가 해법을 사실상 인정한 첫 합의라고 평가된다. 

그러나 구체적인 평화협정이 맺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충돌은 계속된다. 1994년 2월 유태인 정착민이 요르단강 서안 헤브론 사원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 신자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최소한 29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이스라엘 북부 아풀라에서 이슬람 과격파들의 차량 폭탄 테러로 8명이 사망하였다.

그럼에도 양측은 1994년 5월 4일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내 예리코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자치권은 인정하되 유태인정착민 보호를 위해 이스라엘 경찰을 주둔시킨다는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에 따라 이스라엘은 1994년 5월 13일 가자지구 내 군사기지를 팔레스타인 경찰에 이양하였다. 1994년 7월 1일에는 아라파트 의장이 가자 자치지구에서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마침내 7월 5일 아라파트 의장과 각료들이 예리코 자치지역에서 취임식을 거행하고 자치정부의 수립을 공식 선언하였다. 그 후 1995년 9월 28일 양측간에 팔레스타인 자치 확대협정, 공식 명칭으로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에 관한 잠정 협정(Interim Agreement on the West Bank and the Gaza Strip)”이 체결되었다. 제2차 오슬로 협정이다. 제2차 오슬로 협정에서는, 기존의 오슬로 협정에서 구상하였던 팔레스타인 영토 내 과도적인 자치정부와 관련하여 서안 지구를 구획 A, B, C로 나누어 구체화하였다. 협정의 내용과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안 제242호와 제338호에 따라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는 구획 A와 구획 B에서 제한적인 행정권을 얻었다. 

제2차 오슬로 협정의 공식 명칭에는 '잠정 협정'이라는 말이 들어가는데, 이는 제2차 오슬로 협정이 후속 협상의 기초가 되어, 최종적으로 종합 평화 협정의 시초가 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제2차 오슬로 협정 체결 이후에도 여러 후속 협정이 맺어졌으나, 최종적인 평화 협정에는 이르지 못했다. 2002년 제안된 중동 평화 로드맵에서는 오슬로 협정을 포기하고 더 느슨한 철수 계획을 세웠다. 결국 오슬로 협정 체제가 실패한 것이다. 구체적 진행 과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95년 11월 2일 이스라엘이 점령지 철수계획에 정한 대로 요르단강 서안 내 예닌 경찰서를 팔레스타인 측에 양도하였다. 이틀 후 1995. 11. 4. 라빈 수상이 이스라엘 극단주의자에 의하여 암살되었고, 1996. 5. 29. 선거에서 우익 리쿠드 당이 승리하였고 네탄야후를 수상으로 하는 이스라엘 정부는 다시 강경정책으로 전환하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하마스가 집권하면서 대이스라엘 강경투쟁을 지속하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 확대 등의 악재가 겹치며 오슬로협정은 더 이상 진척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재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대체로 이스라엘의 생존권을 인정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독립국가의 수립을 결사반대하는 형국이다. 라빈의 암살 이후 애초에 그들이 약속하였던 2국가 해법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오슬로 협정에 대한 비판적 검토

원칙적인 입장을 지키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특히 이 분야의 전문적 식견을 가진 학자들은 오슬로 협정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찌그러진 영토에서라도 그들의 평온한 공간, 즉 팔레스타인 국가의 건국을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슬로 선언의 내용과 이후 진행 과정을 살펴본다.

우선 원칙선언의 대명제인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간단히 요약하면 팔레스타인인들은 자신의 영토를 점령자 이스라엘로부터 돌려받고, 그 대가로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의 공격중단 및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이 점령당한 자신의 영토를 회복한다는 점에서 보면 영토의 회복이라는 개념은 일단 적정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으로부터 평화를 보장받는다는 인식은 문제가 있다. 평화의 반대인 전쟁 혹은 분쟁은 두 주체가 관련되어 있어 쌍방의 책임을 검토해서 그 책임소재를 평가해야 되며, 현 상태에서 평화 부재의 주요 원인은 이스라엘의 점령이고 그 발현형태는 이스라엘군의 주둔, 팔레스타인인의 저항시위와 하마스 그룹의 대이스라엘 적대정책과 무력 공격, 이스라엘군의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 침공과 민간인 살상행위 등이다. 평화부재의 근본적 원인은 이스라엘의 점령에 있고, 그 발현형태와 관련해서는 쌍방이 폭력의 유발자이다. 이러한 전제에서 보면, 팔레스타인인들은 특별히 얻는 것 없이 원래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것을, 그것도 전부가 아니라 그 중 많은 부분을 포기하고 일부만을 회복하는 것이고,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인들에 의한 테러행위를 포함한 모든 무력적 저항운동의 포기를 보장받는 것이다.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은 이스라엘이 양보했다고 흔히 인정받는 팔레스타인 '자치'의 본질이다. 마드리드 회담을 시작한 이츠하크 샤미르나, 오슬로 협정에 서명한 이츠하크 라빈이나 모두 팔레스타인인에게 허용되는 자치는 주민들의 자치는 인정하지만 땅에 대한 자치권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978년 캠프데이비드 회담에서 메나힘 베긴이 밝힌 구상의 연장선상이다. 이들의 구상은 팔레스타인 땅 전체에서 오직 한 민족, 유대인만이 주권을 누릴 수 있으며, 이 땅의 이름은 팔레스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땅(Eretz Israel)'이라는 이스라엘 우파의 견해, 즉 시온주의 교리의 핵심과 일치하였다. 

다음으로 볼 것은 너무나 불공정한 협상 내용이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은 문제의식에서 나온 협정 결과는 처음부터 불균형한 출발일 수밖에 없었다. 유엔결의 242호에 따라 이스라엘이 1967년 전쟁에서 점령한 영토 내에서 완벽히 철수해야 하는 것이 최소한의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원칙으로 보면 유엔결의에 의하여 국경선이 그어진 1차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지만, 이스라엘의 점령은 이미 국제사회의 현실이 되어 팔레스타인인들을 제외하고는 이 주장을 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유엔 안보리 결의 242호는 확실히 다르다. 이스라엘의 점령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철수를 명한 것이다. 이 결의의 내용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의 전면 철수를 현실화하지 못한 것은 깡패로부터 폭행을 당하여 큰 상해를 입은 선량한 시민이 몸도 회복하지 못하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더 이상 두드려 패지 않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과 같다. 이런 내용이 받아들일 수 없는 불균형한 해결책이라는 것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견을 같이할 것이다.

오슬로 협정 이후

오슬로 평화 협정이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협정 위반이다. 극우주의자에 의한 라빈 총리 암살과 그를 이은 우파 정부에 의한 협정의 사실상 파기에 의해 오슬로 협정은 그 수명을 다하게 된다. 이러한 침략자의 약속 위반과 억지에 대하여 국제연합은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의 거부권 행사라는 무기에 의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이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은 1998년 10월 25일 '와이 협정'(Wye River Memorandum)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은 1967년 점령한 요르단강 서안을 단계적으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에 이양하고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영토와 평화의 교환'이라는 성과를 이루어 내었다. 1999년 5월 평화공존을 공약으로 내 건 바라크가 이스라엘 총리로 당선된 후 평화협상이 재개되고 양측은 9월 4일 와이협정의 후속조치로 이스라엘 점령지역의 일부 영토에 대한 추가 이양에 합의하였다. 2000. 6. 11.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로 시작된 캠프데이비드에서의 아라파트와 바라크의 회담은 같은달 25.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종결되었다. 같은해 9. 13. 아라파트는 이스라엘, 미국과 상의 없이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하였다.

양측 평화협상이 교착된 상태에서 2000년 9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순례자 간의 투석으로 촉발된 충돌에 이스라엘 경찰이 발포한 사건을 계기로 반이스라엘 봉기인 2차 인티파다가 일어났다. 팔레스타인의 폭력을 동반한 시위와 간헐적 대이스라엘 테러에 대하여 이스라엘군은 탱크와 미사일 등을 동원하여 보복하는 등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양측의 충돌로 12월까지 약 300명이 사망하였다. 

이후 평화협상은 교착되고 이스라엘과 가자지구의 통치권을 가진 하마스 정권과의 긴장과 갈등으로 '평화와 영토의 교환'은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2023년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으로 촉발된 가자지구의 전쟁 참상을 오늘날 우리는 보고 있다. 

[기고]  성상희 / 변호사. 생명평화아시아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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