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왠지 기자가 아닌 거 같애...”

평화뉴스
  • 입력 2004.12.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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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들의 고백 33> MBC 윤영균
...“내용보다 장식을 좇는 방송기자...”
“기자들이 조금만 더 제 역할을 해준다면...”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덧 중견 기자의 길로 접어든 듯하다. 21세기를 여는 해의 마지막 달 입사를 했으니 벌써 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그만하면 중년 기자라는 타이틀도 어울릴법 하지 않은가?

이 코너의 제목은 '기자들의 고백'이다. 그런데 사실 미리 고백을 하자면, 난 기자가 아닌거 같다. 그래서 이 코너에 글을 쓰는게 적절한지 의문이다.

내가 왜 기자가 아닌거 같은지부터 말해보자.
우선 현재 나의 역할은 스포츠 취재기자 겸 스포츠 피디다. 기자 하면 사회의 비리와 어두운 면을 마구 속속들이 파헤치면서 고쳐나가는 고귀하고 거룩한 직업일 터인데, 내가 하는 스포츠 취재는 고발하고 파헤치는게 아니라 아름답고 재밌게 포장하는게 일이다.

스포츠 피디의 역할로 넘어가면 더욱 가관이다. 피디라는게, 영화감독이 여배우랑 우아한 자리에서 커피 마시면서 작품성에 대해 토론하는 사람만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진흙탕 속에서 뭐 하나라도 '방송다운' 그림을 만들기 위해 북치고 장구치는 그런 사람이다.

'기의(뜻)'보다는 '기표(표현)'를, '의미'보다는 '이미지'를, '내용'보다는 '장식'을 좇는다는 방송기자보다 한참 더 저쪽으로 멀어진 셈이다.

사실 내가 '기자'이던 때도 있었다. 벌써 중견의 위치에 오를 정돈데, 스포츠쪽 밖에 하지 않았겠는가.

이런 일이 있었다. 초년기자 시절, 비슬산이 초전박살 났다는 제보를 듣고 카메라기자 선배랑 네시간을 걸어 올라 현장에 도착했다. 어림잡아 3-4킬로미터에 걸쳐 아름드리 나무 수백그루가 굴착기에 밀려 쓰러져 있었다. 세상에 입사하고 이런 모습은 처음 본다는 그 카메라 선배랑 황폐한 길을 따라가다 보니, 그 당시 시장 친척의 묘가 나왔다. 알고봤더니 아랫마을이 시장 가문의 집성촌이었다. 묘길을 내기 위해 굴착기로 수킬로미터의 산을 작살낸 상황.

우선 회사로 와서 훼손된 비슬산 어쩌고 저쩌고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고는 '그 길에는 시장의 증조부 묘가 있었습니다' 뭐 이런 식의 문장을 넣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는 빠졌다. 그 묘 때문에 산이 작살났다는 증거가 없지 않느냐. 수긍했다. 내가 제대로 취재를 못했기 때문이야...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정신질환자들의 운전면허를 제한하는 움직임이 있다는 제보에
정신과 전문의, 정신질환자, 경찰청 등을 취재했다. 취재하다보니 상황은 심각했다.
그 당시에는 대구와 청주였나 뭐 그 정도에서 정신질환자를 대상으로 운전면허 재시험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경찰청 취재 결과 전국적인 상황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뭐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아는 인권 개념으로는 위헌적인 상황이 너무나 분명해서 인터뷰까지 다 끝내고 기사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반응이 나왔다. '미친놈'들이 차를 몰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그냥 둔다는 말이냐... 뭐 이정도였다.

나는 순간 아찔해졌다. 내가 뭐 잘못 알고 있을 지도 몰라. 왜냐하면 언론사의 높으신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늘같으신 선배님들까지 아무 말씀도 안하시는걸로 봐서 나 혼자 이런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 2분이 넘던 기사와 그래픽, 인터뷰 테잎에는 먼지가 쌓여 갔고, 그리고 몇 달인가 지나서 감사원인가 인권특윈가 어디선가 조사 결과 발푠지 시정 명령인지가 났고, 티비로 나오는 전국뉴스를 통해서야만 내 생각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역시 나는 기자가 아니었다. 내가 수긍 못하면 끝까지 그게 아니라고 주장도 하고 항의도 하고 뭐 그렇게 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참 쉬운 일만은 아닌거 같다. '기자'였을때 수없이 겪은 일이긴 하지만, 기사가 되려면 주인공이 아주 나쁜 놈이거나 아주 좋은 분이어야 한다. 어중간하게 착하거나 어중간하게 비리를 저지르면 별로 기사로서 빛을 보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세상이라는게, 인생이라는게 그렇게 명확하게 극단적으로 어디 나가던가.

그러다보니 특히 공무원들을 "어이없게도 핑계 대기에 급급합니다..." "허구한날 예산 타령이나 합니다" 등의 문구로 조지며(비판하며) 나쁜 놈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조지면서도 난 알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사람들 입장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기사 하나 때우기 위해서 미안하지만 당신을 좀 조지겠다고... 조지기 위한 조짐을 난발하는 것은 기자가 아니라 '전문 조지미' 내지 '조파라치' 정도가 아니었을까... 역시 난 기자가 아니었어...

그 짧았던 '기자'생활을 되돌아보면, 굵직한 일이 참 많았다.
개구리소년(도롱뇽소년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건과 지하철 사건 등... 개구리소년 사건 때는 특히 경찰의 단순, 무식함이 돋보였고, 지하철 사건 때는 시장을 포함한 공무원들의 그것이 빛을 발했다. 그런 위치에 있는 자들이 일반 시민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콧방귀를 뀌는지 알수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지만' 대구의 기자들이, 사회의 목탁이며 빛이며 소금이며 어쩌고 저쩌고들이, 조금만 더 제 역할을 해줬어도 현실은 조금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도 달라지지 않을까. 나 말고 진정한 기자들이 조금만 더 바뀐다면 말이다.

대구MBC 윤영균 기자 (novirusy@tgm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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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매일신문 한윤조 / 26. 대구MBC 심병철 / 27. TBC 이지원 / 28. 대구신문 윤정혜
29. 경북일보 김종득 / 30. 영남일보 이춘호 / 31. 매일신문 최정암 / 32. TBC 이종웅
33. 대구MBC 윤영균 / 34. 영남일보 이진상(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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