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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5공동선언을 다시 생각한다
[김두현 칼럼] "제재와 대화의 실질적 병행, 남북 당국자간 만남이 우선이다"
2017년 06월 15일 (목) 09:07:21 평화뉴스 pnnews@pn.or.kr

오늘은 분단이후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나 통일의 이정표인 6․15공동선언을 발표한지 17돌이 되는 날이다. 어느덧 양 정상이 두손을 맞잡던 환희는 사라졌다.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열었던 하늘길, 금강산 관광이 열었던 바닷길과 땅길 모두 닫힌지 오래이다.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은 오늘도 선전방송에 열을 올리고 있다. 6․15가 낳은 옥동자인 개성공단마저 북한의 핵실험을 빌미로 폐쇄된지 1년이 훌쩍 넘어서고 있다.

6․15공동선언이 가져왔던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시간은 지나갔고 대립과 갈등의 익숙한 모습이 현재의 남북관계의 적나라한 현실이다. 남북관계의 현실이 어렵다고 6․15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는다. 더욱이 새롭게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햇볕정책과 6․15공동선언의 계승을 이야기하고 있기에 과연 6․15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겠다.

최고지도자의 서명이 합의 이행 가능케 해

남북의 합의는 6․15 공동선언 이전에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때인 1972년의 7․4남북공동선언과 노태우 정권때인 1991년의 남북기본합의서가 그것이다. 7․4공동성명은 서명의 주체에 공식적인 국호가 빠져 있다. 상부의 뜻을 받들어 남의 이후락과 북의 김영주가 서명한 문서이다. 세계적인 데탕트 분위기속에 박정희 정권의 대북정책이 “대화 없는 대결에서 대화 있는 대결로” 변화했지만 여전히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정식 국호인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가 명시되어 있다. 서명의 주체 역시 당시 양측 정부의 총리였던 남의 정원식과 북의 연형묵이 직접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와 3개의 부속합의서는 지금 보아도 남북 사이에 더 이상 합의할 것이 없을 정도로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노태우 정권의 한계와 1차 핵위기의 발생으로 인해 남북기본합의서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였다.

   
▲ 6.15남북공동선언(2000.6.15) / 사진 출처.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

6․15공동선언이 과거 합의와 가장 크게 다른 것은 현실적으로 이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6․15공동선언 이후 남북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였다. 대결과 갈등의 관계가 화해와 협력의 관계로 전환된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많은 부분에서 변화를 이루어내었다. 부산아시안게임과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에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을 파견한 것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화교류가 이루어졌다. 경의선과 동해선이 연결되고 개성과 금강산 관광이 진행되었다. 또한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이 착공되고 가동되었다. 국제무대에서도 남북은 대결이 아닌 협력을 하였다. 일본을 상대로 독도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공동대응하였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공동입장을 통해 남북의 화해와 평화에 대한 의지를 전 세계에 과시하였다. 서류상 합의가 아니라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 6․15공동선언이다. 6․15공동선언의 서명주체가 남북의 최고지도자인 남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으로 이행의 담보가 이루어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6․15공동선언이 과거의 합의와 다른 또 하나는 자주의 원칙이 반외세의 강조에서 우리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변화하였다는 것이다.  6․15공동선언의 1항은 다음과 같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이는 북이 과거 남한 정권과 달리 김대중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남북의 당국이 남북관계와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주체임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과정으로서의 통일 합의한 6․15공동선언

과거의 합의와 다른 가장 중요한 차이는 남과 북이 통일의 방향에 대해 최초로 합의한 것이다. 바로 6․15 공동선언의 2항이다.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2항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를 통일방안의 합의로 보면 무리가 따른다. 통일방안에 대한 합의라기 보다는 통일의 방향에 대한 합의라고 봐야 보다 정학하게 해석할 수 이있다.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의 증언에 따르면 2000년 정상회담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완전통일은 남북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잘하면 10-20년내에 성취할 수 있을 것이라고 언급하자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위원장은 40-50년이 걸릴 지도 모른다고 했다고 한다.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평화공존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 6.15남북공동선언(2000.6.15) / 사진 출처. 김대중평화센터 홈페이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의 공통점은 통일을 한꺼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 단계적으로 추진하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해 당장 우리가 추구해야 할 통일은 결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라는 것이다. 법적, 제도적 통일이 아니라 서로 자유롭게 오고 가며 돕고 나누는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즉각적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 법적, 제도적 통일이 아니라 사실상의 통일을 위해 필요한 것은 남북의 지속적인 화해협력의 추진이 필요하다. 화해협력의 핵심은 남북의 자유로운 교류일 것이다. 이 과정에 시민의 역할이 있고 지방의 역할이 있다. 즉각적 통일과 법적, 제도적 통일을 강조할 경우 국가와 중앙정부의 역할이 강조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과정으로서의 통일과 사실상의 통일상황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역할과 지방의 역할이 커지는 것이다. 통일의 과정에 시민과 지방이 활발하게 참여할 때 통일결과의 민주성이 강화될 것이다.
 
일관된 대북정책이 필요

6․15공동선언은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을 꾸준히 추진한 성과로 가능했다. 따라서 대북포용정책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흔히 대북포용정책을 대북유화정책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해이다. 이는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대북정책의 첫 번째 원칙이 “한반도의 평화를 파괴하는 일체의 무력도발 불용”이라는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군사적 안보태세를 확고히 하며 평화지키기(Peace keeping)를 소흘히 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대북정책의 두 번째 원칙과 세 번재 원칙에서 평화지키기(peace keeping)를 넘어 평화만들기(peace making)에 대한 확고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즉 두 번째 원칙인 ‘흡수통일 배제’를 통해 북한과의 불필요한 갈등을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베를린 선언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흡수통일 배제’ 원칙을 밝힘으로써 북한이 안심하고 대화에 나올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였다. 세 번째 원칙인 “남북간 화해협력의 적극 추진”은 군사적 안보 태세 강화를 통한 평화를 넘어 남북간 적대관계를 화해협력 관계로 변화시킴으로써 궁극적인 평화를 추구하며 통일의 기반을 만들어 나가기 위한 것이다.

흔히 대북포용정책을 첫째, 쉬운것을 앞세우고 어려운 것은 뒤에 해결하는 선이후난(先易後難), 둘째, 경제적인 것을 우선적으로 하고 정치적 문제는 나중에 푸는 선경후정(先經後政), 셋째, 민간을 앞세우고 관이 뒤에 돕는 선민후관(先民後官), 먼저 주고 나중에 얻는 선공후득(先供後得)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 <경향신문> 2016년 2월 11일자 1면

대북정책은 방법상의 세밀함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원칙은 흔들림 없이 지속적이고 일관된 추진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을 추진할 때와 지금의 여건이 다르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이다. 북한의 지도자가 바뀌었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능력이 강화되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10년동안 6․15의 성과는 무너지고 남북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국민들의 대북정서도 악화되었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대북포용정책을 펼칠 당시에도 쉬운 여건은 아니었다. 50년간의 냉전반공체제의 지속으로 국민들의 대북적대의식은 확고하였고 클린턴 정부의 대북관계 역시 ‘금창리 핵시설 의혹’등으로 대결이 심화될 때였다. 김대중 정권 시기 남북관계가 늘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초기에는 햇볕정책에 대한 북한의 오해로 어려웠고 후기에는 부시정부의 등장으로 인해 어려웠다. 금강산 관광 역시 ‘민영미씨 억류사건’으로 중단되기도 하였으며 1,2차 서해교전으로 인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남북관계는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와 정책의 일관된 추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군사적 도발 불용’이라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흡수통일 배제’와 ‘화해협력의 적극적 추진’을 통해 관계개선을 시도해나갔듯이 문재인 대통령 역시 북한의 핵과 미사일 실험에 대한 단호한 입장 표명을 넘어 ‘대화’를 통해 남북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즉 ‘제재’와 ‘대화’의 실질적인 병행이 필요한 것이다. 그 출발은 형식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당국자간의 만남이 될 것이다. 

   





[김두현 칼럼]
김두현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사무처장. 평화뉴스 칼럼니스트


6.15 남북공동선언(전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에 따라 대한민국 김대중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월 13일부터 6월 15일까지 평양에서 역사적인 상봉을 하였으며 정상회담을 가졌다.

남북 정상들은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이번 상봉과 회담이 서로 이해를 증진시키고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을 실현하는 데 중대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남과 북은 올해 8·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 친척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 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하여 민족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 남과 북은 이상과 같은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서울을 방문하도록 정중히 초청하였으며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앞으로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2000년 6월 15일
대한민국 대통령 김대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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