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대 다니는 것 부끄러운 줄 알아라”

평화뉴스
  • 입력 2005.03.17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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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의 목요칼럼 2>
...“대학교육, 지식권력 재생산구조를 돌아보라”
“대학평가나 연구대학 선정 만으로는 풀 수 없어"
..."문제의 핵심은 대학서열구조”

"국립대 다니는 것 부끄러운 줄 알아라”
지금부터 꼭 30년 전 이맘때 필자가 대학에서 문학개론이라는 것을 처음 맛보게 되었을 때, 수업 듣겠다고 앉아있는 신입생들에게 김윤식 선생이 아주 심각하게 인상쓰며 던지신 화두다. 이어서 제국대학이니 우골탑이니 하는 생경한 어휘들이 그렇지 않아도 쌀쌀맞은 서울 풍토에 한참 주눅들어 있던 필자의 의식세계를 두들겨댔다.
그 시절에 선생의 말뜻을 당장 알아듣고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 심각한 분위기에 매혹되어 그냥 흘려 넘겨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을 뿐이다.

그 후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대학가를 본거지 삼아 살아오면서 어쩌다 한번씩 그 부끄러움의 정체를 들여다보곤 한다. 그것은 분명 미국 내지 서구중심의 계산법으로 세계 몇몇 등에도 끼지 못한다는 식의 평가결과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그런 평가 따위가 있다는 소문조차 듣지 못했다. 학생들 취업률이 저조하기 때문도 아니었다. 당시에는 국립대졸업생이면 대개 이런저런 업체들에서 화이트칼라로 밥벌이할 수 있었다.

학생들 학력이 예전만 못해서도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입시는 만능선수를 요구했었다. 입시경쟁률이 낮거나 미달사태가 일어나서도 아니었을 테고, 교수 충원율이 형편없어서도 아니었을 것이며, 대학경영진이 비리의 백화점을 차려놓았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물론 학교폭력이나 성적조작 따위를 예견했기 때문도 아닐 것이다.

아마 국민들의 혈세 덕택에 싼값으로 출세의 발판을 다지면서 이를 자랑으로 여기게 해주는 지배적 지식권력 재생산구조를 돌아보라는 말씀이었으리라. 코앞의 이권과 학벌의 특권에 매달리며, 더불어 사는 도리를 천시하는 풍토를 경계하라는 덕담이었으리라. 멸사봉공 내세우는 인간일수록 자신의 무의식적 욕망과 대면코자 노력하라는 격려말씀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한 부끄러움은 지식인 모두의 공유물이지 어찌 국립대학생들만의 문제이겠는가.

국가적 난제인 교육개혁을 위해 경제전문가가 투입되었다. 3불정책을 비롯해 기존의 정책기조를 크게 흔들지 않겠다는 장관의 다짐 덕분인지, 임명 초기의 광범한 반발은 일단 잠잠해진 상태다. 근래에 장관이 밝힌 대학개혁 관련 구상조차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고 언론을 스쳐갔다. 그 요지는 전문평가기관의 평가결과를 공개하여 입시생들의 판단을 돕고, 연구중심대학 15개 정도를 선정해 연구할 만한 대학이 되도록 집중 지원한다는 것이다.

그 매직넘버 15에 포함될 만한 대학관계자들은 내심 어떤 기대에 부풀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아도 서열구조로 시장도태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는 그 바깥의 대학들은 빈익빈부익부를 더욱 고착시킬 이 정책을 일종의 위협조치로 받아들이기 쉬울 것이다. 주변부 대학 입장이 아니라도 15개 대학이 잘 나가면 우리나라 교육문제가 풀리기 시작할지, 그냥 두뇌21 비슷한 나눠먹기와 길들이기의 복사판이 안 될지, 그런 처방으로 공교육이 살아날 수 있을지, OECD 국가중 사교육비 1위라는 범국민적 짐덩어리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을지 기대보다 의구심이 앞선다.

대학서열 내지 학벌로 인해 온갖 문제가 분출하는 상황에서 서열을 좀더 확연히 드러내놓으면 입시생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을까? 연구할 만한 대학에 들어가려면 과외비는 얼마나 쏟아부어야 할까? 대다수 대학들이 학생을 못 채워 호객행위에 여념이 없는데, 교수 1인당 학생 수는 왜 최후진국 수준으로 넘쳐나야만 할까? 대학정원보다 지원자가 적어 얼마든지 대학에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찬란한 성장기의 학생들은 마음 편히 좋은 소설 한 권 제대로 읽기 어려운 것일까? 옆의 친구들을 경쟁상대 내지 적으로 보아야 하는 전쟁판에서, 이웃과 더불어 따뜻한 마음을 나누라는 지당한 말씀조차 어디 발붙일 자리가 있을까?

경쟁력이라는 깃발 아래 대학을 시장판에 내맡겨 놓고, 대학인들 스스로 시장판에 적응하기에 여념이 없는 한, 시장의 논리와 시장의 야만을 넘어설 비판적 대안적 연구성과를 기대할 곳은 없다. 기업들의 요구가 경쟁력의 절대 기준이라면, 삼성대학이나 현대대학 따위에서 고분고분한 기능인들 육성하면 되지 골치 아픈 인문과학과 사회과학에 그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부지원금 수혜 경력이 교수 평가의 주요 척도가 되고, 한참 팔팔해야 할 젊은 연구자들조차 그런 교수들 아래의 크고 작은 지식권력 집단에 속해야 시장판에서 살아 남는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정부의 정책들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고, 어찌 미래를 위한 긴 호흡의 연구가 가능하겠는가? 대학인들 스스로는 대학의 존재근거에 대해 얼마나 자각하고 있으며, 현재의 지배논리에 대해 어느 정도의 항체를 만들어내고 있는가? 이 대목에서 우리의 지식사회는 부끄러움의 단계를 지나 참담함의 수준에 들어서 있다.

구조적인 문제를 개개인의 차원에서 떠맡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확실히 교육문제는 지식인들의 자각과 도덕적 자세만으로 풀리지 않는다. 구조를 바꿔야 한다. 문제구조의 핵심은 대학서열이다. 이 문제를 피해가려는 임시변통의 처방들 뒤에는 항상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주의가 깔려 있다고 의심하고 싶다. 교육정책 수립과정에서 독일이나 프랑스의 비서열구조를 곁눈질이라도 하면 안 되는지 묻고 싶다. 일류와 이류의 격차를 더욱 벌려놓지 않고는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도 창조적 지식을 만들 수도 없는지 따지고 싶다.

대학서열이 무의미해질 때까지는 수많은 난관이 있을 테고, 얼마나 긴 세월과 노력과 희생이 필요할지도 장담할 수 없다. 사학악법 개정조차 언제 이루어질지 답답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정책 방향마저 서열완화와 그 궁극적 소멸을 향하는 쪽으로 잡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불평등구조는 영원히 재생산될 것이다. 지금부터라도 세금 덕택 많이 보는 국립대 내지 일류대 관계자들께서 부끄러움 많이 타면서 사고전환 확실히 해주시길 천지신명께 빈다. 적어도 그 부끄러운 국립대 일류대 칭호를 자랑거리로 삼으려면, 학력이나 재력 있는 학생들을 독점하려 발버둥치는 대학이 아니라, 어떤 학생이 오더라도 능력 있고 인간미 넘치도록 교육해내는 대학으로 변신해 보시라.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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