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벗어나기”

평화뉴스
  • 입력 2005.03.24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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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의 목요칼럼 3>...
“독도 문제, 우리사회 식민지 상황의 자각이 필요하다"


독도 문제가 불거지면서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조금 뜨는가 보다. 나는 방영 초기부터 주말 저녁 아홉시 반을 기다리는 이른바 불빠다. 23전 23승이라는 불패의 신화 자체도 감탄스럽기는 하지만 내게는 재미의 각별한 근거가 못된다.

일제 식민지배에 대한 원한이나, 우리 민족의 운명을 주물러온 초강대국들의 힘에 대한 무의식적 선망이 혹시 그 재미 뒤에 도사리고 있는지는 정신분석광들이나 파헤칠 일이다. 나의 의식을 사로잡는 것은 그 승리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그 바탕에 깔린 정신이다.

이순신의 스승은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과 가난한 백성 가운데 그 누구도 외적이나 탐관오리들의 폭력에 유린당하지 않도록 막는 것이 무인의 본분이라고 가르친다.

양반출신이지만 역적의 자손이었던 이순신은 백성들의 온갖 고난을 직접 맛보는 가운데 스승의 가르침을 몸으로 체득한다. 어디까지가 역사고 어디부터가 픽션인지 굳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드라마가 그려내는 이순신의 이미지는 명확하다.
그는 원균이나 신립처럼 개인기 믿고 대마도 원정 따위를 호언하는 팽창주의자가 아니라, 위기 상황에서 민중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만드는 조직가인 것이다. 배 밑창에서 노 젖는 사람들부터 주먹밥 짓는 아낙들에 이르기까지 전 민중이 침략에 맞선 저항의 주체가 되어가며 자신의 능력들을 비범하게 발휘하는 과정에 작품의 묘미가 있다. 오늘의 민족문제를 풀어갈 해답을 암시하는 듯하다.

“독도 문제의 핵심은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 찾기...극복의 원리는 민족간 개인간 평등”
“식민지 상황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혈맥을 갉아먹고 있지만, 그 침식의 폭과 깊이에 대한 자각은 늘 부족해 보인다”


독도 문제의 핵심은 식민지 상황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은 우리사회의 식민지 상황을 직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반세기가 지나도록 식민지 상황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혈맥을 갉아먹고 있지만, 그 침식의 폭과 깊이에 대한 자각은 늘 부족해 보인다. 일본 정객들의 망언에 대한 일과성 분노나 극우세력의 제국주의적 팽창기도에 대한 대증요법만으로 식민지 탈출은 불가능하다.

친일파들이 사회 곳곳에서 큰소리치며 군림해왔고, 독립운동가들과 그 자손들이 수난을 면치 못해온 치욕의 역사부터가 해방의 의미를 다시 살피게 한다. 상당한 특권으로 무장된 국회의원들조차 친일관련 문제는 자유롭게 언급하기조차 어려웠던 것이 그 동안의 정치 현실 아닌가. 친일을 비판하는 학술행위만으로도 철밥통 중의 철밥통인 국립대 교수직까지 날아갔던 것이 바로 엊그제 일이다. 종군위안부와 징용 희생자들이 식민지 참상을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로 증언해도,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유령 앞에 충성을 바치는 인간들로 차고 넘쳐나는 곳 또한 식민지 현장 아닌가.

문제가 이 정도에 그친다면 그래도 머지 않아 해결될 것이다. 이제 친일파와 그 자손들이 우리 사회의 주류임을 자처하고 온갖 특권을 대물림하며 설치던 시대는 지났기 때문이다. 친일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 정치 집단에는 미래도 없다고 악담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식민지 문제는 일본과의 관계를 넘어선다.
대미 경제의존도는 이제 안심할 정도가 되었는지, IMF는 완전히 남의 일이 되었는지, 언제 국제자본의 농간이 다시 시작되지 않을지 그 불안은 미래진행형이다. 미국에 상납한 전시작전지휘권을 반세기 넘도록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사회구성체에 대한 합리적 논의들을 모두 무색케 하는 식민지 구조의 대표상징일 것이다.

“학문적 식민지 상황의 물적토대"...."교수 대부분 미국박사, 학생들까지 미국식 의식구조, 토익 토플 단어 외우기로 진을 빼야 하는 산업구조”

문제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는다.
경제적 정치적 식민지 구조는 정신의 영역이라고 온전히 남겨놓을 리 없다. 누군가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따온다고 해서 내가 그것에 대해 특별히 원한이나 선망을 느껴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대학교수와 교육정책 담당자들 절대다수가 미국박사라는 데에는 의구심이 일어난다. 미래의 주인공들인 젊은 학생들까지 미국식 의식구조에 무방비로 내맡겨져 있지 않은지 두려움을 느끼지 못 한다면 이는 학문적 식민지 상황에 대한 둔감성의 명백한 증거다.

좀더 손에 잡히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대졸자가 토익 토플 점수 못 올리면, 실제 업무능력과 무관하게, 일자리 찾기 어렵다는 것은 국민상식이다. 그렇게 아무 일자리에서나 다 요구하는 토익 토플 고득점을 위해서는, 3년쯤 매일 5시간 정도 투자해야 할 것이다. 대다수 대학생들이 번듯한 직장을 잡으려면 황금시절의 대부분 동안 토익 토플 단어 외우기로 진을 다 빼야 하는 산업구조, 이것이 학문적 식민지 상황의 주요 물적 토대다.

전공 관련 전문지식을 쌓는 일이 처음부터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는 계산은 자동으로 나온다.
토익 토플이 탈식민주의 지침서일 리도 없고, 역사학이나 사회학 혹은 문학이론의 기초를 다져줄 리도 없다. 이런 구조 속에서 학문적 식민지 상황을 탈피하는 일은 초인적 노력과 희생 그리고 기적의 합작품이 될 것이다.

식민지 상황을 자각하자는 것은 일제와 미제를 쓸어내고 우리끼리만 잘 살자거나, 우리 내부의 억압은 참아주자는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우리 내부 억압의 한 가지 본질적 축을 분명히 드러내자는 것이다. 또한 대외적 대응의 실마리를 대내적 해방에 근거하여 만들어가자는 것이다. 구성원들이 지키고 싶어할 가치를 마련해주지 못하는 사회, 주체로서 누려야 할 자율성과 자유를 보장하지 못하는 억압사회는 대외적 저항력도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약자를 짓밟아도 신성하다는 저의의 다른 표현”...“반인륜적 식민지 경영의 폭력원리”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의 보편적 성격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만들어낸 다양한 문화물을 적극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일은 식민지 상황의 극복에도 불가피하다. 그것이 설혹 제국의 심장부에서 만들어진 것일지라도 그 활용방식에 따라서는 식민지 상황의 해소에 기여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다양한 억압의 제거를 위해, 적어도 완화를 위해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다.

같은 논리를 문화물에 국한하지 않고 인적 교류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전 세계의 다양한 해방운동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동참하는 것, 적어도 약소민족들을 억압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식민지 상황 극복에도 기여할 것이다. 그 기본원리는 민족 간, 개인간의 대등한 관계 내지 인간평등이다.
독도 문제 해법으로 흔히 일본내의 양심세력과 연대할 필요성이 제기되곤 한다. 실효성 이전에 그 발상은 정당하다.

그러나 예컨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극약처방, 즉 일본에 핵이라도 쏘겠다는 자세로는 식민지 탈출의 논거를 마련할 수 없다. 우리도 쏘지 않겠지만 너희도 쏘아서는 안 된다는 원칙을 관철시키는 방법말고는 폭력의 무한 악순환을 벗어날 길이 없다. 현실적 난관을 고려하더라도 지향점을 개인간, 민족간 대등한 관계에 두지 않고는 식민지 탈출도 없다.

현정권의 빈약한 평등주의마저 좌파 바이러스라고 아우성치는 시장지상주의는 대내외적 식민주의 예찬론이기도 하다. 시장이 신성하다는 주장은 약자를 짓밟는 힘도 신성하다는 저의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이 바로 반인륜적 식민지 경영의 폭력원리 아니었던가.

오늘의 식민지 상황은 한두 이순신의 힘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개인과 민족의 평등권을 지키고 억압을 제거하려는 무수한 조직가들이 필요하다.
개개인 모두가 다층적 해방운동의 조직가로 변신해갈 필요가 있다.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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