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터, 예감이 좋다”

평화뉴스
  • 입력 2005.07.14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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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승용의 목요칼럼16]...
“북으로 갈 200만kw 전력, 온 겨레 갈등도 녹여주기를”

옛날 어른들이 저녁상 치우고 난 후 시원한 평상 위에 옹기종기 둘러앉은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에는 도깨비들이 단골로 출몰했다. 아이들은 도깨비 방망이 하나 얻으면 얼마나 좋을까 침을 삼켜가며 구수한 이야기에 빨려들곤 했다.

도깨비 터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도깨비 터에 지은 집에서는 종종 해괴한 일들이 벌어진다고 한다.

가마솥에 덮어놓은 솥뚜껑이 솥 안에 들어가 앉아 있기도 하고, 방문 문고리를 아무리 잘 걸어놓아도 한밤중이면 어느새 방문이 스르르 열리는 등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이른바 도깨비장난이 수시로 일어난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도깨비 터에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죽거나 하지만, 도깨비들과 잘 사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해설이 첨부되기도 했다. 정신력 없는 약골들이 도깨비 타령을 할 뿐이니 겁먹을 필요 없다는 충고도 빠지지 않았다. 좀 황당한 이야기였지만 그 속에서 옛사람들의 삶에 대한 자신감과 주체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사람 하기 나름으로 어지간한 난관은 얼마든지 긍정적 가치로 전도될 수 있으니, 쉽게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하기 나름으로 망할 수도 흥할 수도 있는 긴장상태야말로 이승생활의 진짜 묘미라고 새길 수도 있다.

그런데 세상 어디인들 크고 작은 도깨비 터 아닌 곳이 있던가. 한반도부터가 어떤가. 조금만 삐끗하면 순식간에 불바다가 될 수도 있고 이른바 ‘핵-열반’이 펼쳐질 수도 있는 곳이다. 80년대식으로 표현하면 세계사적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도깨비 터인 셈이다.

맥놓고 있다간 미국산 네오콘 도깨비, 일본산 군국주의 도깨비, 중국산 러시아산 패권주의 도깨비들의 도깨비놀음에 온 민족이 병들어 쓰러질 수도 있다. 반대로 우리가 하기에 따라서는 궁색한 살림이 펴질 수도 있다. 6. 25와 6. 15 사이에서 어느 쪽으로도 치달을 가능성이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6자 회담 재개 및 경협사무소설치나 경원선 동해선 개통을 포함한 남북경협 합의 소식은 이제 한반도가 6. 25보다는 6. 15, 적대와 분단보다는 평화와 통일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는 신호로 보여 반갑기 그지없다. 정부의 외교적 노력을 군소리 빼고 일단 치하하고 싶다. 동북아 균형자론이라는 화두도 미국이나 일본의 눈치 덜 보겠다는 주체의식의 표현으로 평가하고 싶다.

그 동안 핵무기를 놓고 벌인 북한과 미국의 기세싸움은 그 뒤에서 실제로 무엇이 오고갔느냐와 상관없이 나처럼 소심한 시민들의 마음을 한참 조마조마하게 졸여놓았다. 이라크전을 훨씬 능가하는 재앙의 가능성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도 북한과의 교류보다 극단적 대립을 더 바라는 거친 목소리도 틈만 나면 불거져 나온다. ‘퍼주기’를 향해 저주를 퍼붓고, 여차하면 한판 붙자고 전의를 불태우는 용감한 분들은 얼마든지 있다. 없는 빨갱이 도깨비까지 정권 유지 차원에서 만들어내던 옛날옛적 이야기는 논외로 쳐도, 아직 우리의 갈등 현장은 만만하지 않은 도깨비 터임이 분명하다.

통일 혹은 민족의 어우러짐과 관련해서는 어쩌면 북미간의 힘겨루기나 남북의 체제적 문화적 이질성 이상으로 우리 사회 내부의 균열이 더 해결하기 까다로운 숙제일 수도 있다. 그 동안의 남북교류 과정에서 동족상잔의 상흔들까지 더디지만 조금씩 치유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러나 우리 사회 내부의 빈부격차 내지 양극화 현상은 그다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권력독점의 구조를 재생산하거나 그 극복을 방해하는 학벌주의와 지역주의의 장벽 또한 강고하다. 이들은 바깥에서 문을 따고 들어오는 제국주의 도깨비들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을 더 깊이 병들게 하는 도깨비들이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앉아 있으라는 법은 없다. 문제는 이 도깨비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도깨비들과 잘 사귀는 비법은 옛날 어른들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도깨비들의 실체가 워낙 다양해서 그때그때 처방이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근본 원리만큼은 분명했다. 우리의 주체적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으며, 그렇게 만들어가는 재미가 지고의 가치라는 것이다.

북으로 갈 200만 킬로와트의 전력이 북미나 남북간의 적대만 아니라 남한 내부의 온갖 차별도 녹이는 좋은 도깨비 노릇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 또한 우리의 향후 노력에 좌우될 것이다. 예감이 좋다.

홍승용(평화뉴스 칼럼니스트. 대구대 독문학 교수)

홍승용 교수님은,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나 강원도 원주와 춘천에서 자랐으며, 서울사대 독어과와 서울대 대학원을 거쳐 지난 ’83년부터 대구대에서 강의하고 있습니다. [문예미학] 편집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미학이론], [부정변증법], [프리즘],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등의 역서와 [루카치 리얼리즘론 연구], [저항의 아름다움], [변혁주체] 등의 논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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