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여덟, 남녘 마지막 생일이기를...”

평화뉴스
  • 입력 2005.10.28 12:2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기수 김원철 할아버지, 29일 대구서 미수연(米壽宴)..
“신의주가 고향...27년 옥고, 고문으로 강제 전향"
"북에 두고 온 13살 아들, 내년이면 환갑인데..”

장기수 김원철 할아버지
장기수 김원철 할아버지

북녘 신의주가 고향인 장기수 김원철 할아버지.
나이 마흔둘에 남쪽으로 내려와 27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지금도 대구 어느 곳의 사법보호소에 살고 있다.

내일 10월 29일이 김 할아버지의 생일이다. 우리 나이로 여든여덟.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는 내일 오후 5시 경북대 복지관 3층에서 김 할아버지의 미수연(米壽宴)을 연다.

여든여덟까지 장수한 것을 축하해 베푸는 잔치 미수연(米壽宴).
김 할아버지는 내일이 남녘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일이기를 바라고 있다.


모진 고문으로 강제전향 했다는 이유로 1차 송환 때 고향으로 가지 못한 김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45년 전 떠나 온 고향 신의주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그곳에는 떠나올 때 13살 코흘리개던 아들과 아내가 있다고 한다. 그 아들도 내년이면 우리 나이로 환갑이 된다.

1918년 10월 29일, 평북 신의주에서 태어난 김 할아버지는, 북에서 선박관리와 기관장을 하며 ‘바다꾼’으로 살다 1960년 남쪽으로 내려와 이듬 해 ’61년 붙잡혀 27년동안 옥고를 치렀다.

특히, 전향공작이 몰아치던 1978년, 모진 고문으로 의식을 잃은 채 강제전향서를 쓰게 됐다.
당시 ‘사상전향 전담반’은 ‘통닭구이’(손과 발을 봉을 가운데 두고 묶어서 거꾸로 공중에 매다는 것)를 시켜 부딪히는 곳 어디라면 몽둥이질을 해댔고, 코에는 고춧가루 물을 부어 대는 등 철저히 동물적 행태를 했다고 한다. 또, 수갑을 채워 의자에 온몸을 묶은 야구방망이로 쳐댔는데, 밤에도 자살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고문을 했다고 한다.

김 할아버지는 ’87년 8.15 사면조치로 출소한 뒤, 대구 어느 곳에 있는 사법보호소에서 살고 있다.
사법보호소는 오갈데 없는 출소자들이 6개월까지 머무를 수 있는 곳인데, 할아버지는 출소할 때 이미 일흔의 고령인데다 남족에 가족이 없어 계속 그 곳에서 지내고 있다.

대구에는 현재, 김 할아버지를 비롯해 박제원(77). 이학천(77). 김종하(76) 할아버지를 포함해 모두 4명의 장기수 할아버지가 2차 송환을 기다리고 있다.

나이 여든여덟에 그리는 ‘송환의 꿈’
내일 미수연(米壽宴)에는 김 할아버지와 양심수후원회 회원 50여명이 참석한다고 한다.
그들 모두는, 내일이 김원철 할아버지가 남녘에서 보내는 마지막 생신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글. 평화뉴스 유지웅 기자 pnnews@pn.or.kr / pnnews@hanmail.net
사진 제공.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김원철 할아버지는 지난 10월 5-6일 평양을 방문했지만 고향 신의주까지는 가지 못했다.
김원철 할아버지는 지난 10월 5-6일 평양을 방문했지만 고향 신의주까지는 가지 못했다.


[참고 자료-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김원철 할아버지의 삶...

- 1918년 10월 평북 신의주 출생
- 1942년 결혼 후, 홀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아들이 있었다.
- 북에서는 선박 관리 및 기관장 등 ‘바다꾼’으로 살아왔다. .
- 1960년 경 남파되어 1961년 검거.
(함께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이 딸의 결혼식에 참석 했는데, 결혼식에 참석한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신부의 아버지를 이상히 여겨 신고하였고 그로 인해 일행 4명은 모두가 구속됨)
-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
- 1978년 전향 공작으로 강제 전향서를 쓰게 됨.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지장이 찍혀 있었고, “조용히 살겠다.”고 한 것이 전향서가 됨)
- 1984년(당시 전주 교도소) 전향 취소의 글을 담당 부서에 제출하였으나, 제출되자 마자 대구교도소로 이감됨.
- 1987년 8.15 사면 조치로 출소
- 출소 후 현재까지 사법보호소에서 생활 중.
- 사법보호소는 오갈 데 없는 출소자들이 최대 6개월 정도 머무르는 곳인데, 할아버지는 출소하실 때 벌써 70세가 넘었고, 남쪽에는 가족이 없어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으며, 경찰도 관리하기에 편리한 점 때문에 지금까지 계속 그 곳에서 살고 있다.
<김원철 할아버지 이야기>
1961년 1월.
함께 내려온 사람들 가운데 한명이 딸 결혼식에 참석한 까닭에 식에 참석한 주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신부의 아버지를 이상히 여겨 신고하였고 그로 인해 일행 4명은 모두가 구속되게 된다. 2명은 1심에서 사형, 2명은 무기징역.

대법원까지의 재판에서 사형이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한 사람. 출소 장기수 김원철 할아버지.
27년 옥고를 치르고 출소 후 사법 보호소에서 줄곧 살아가고 계시는 김원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그 날은 가을이라 생각하기에 너무나 궂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가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사법보호시설임을 전혀 알 수 없는 한 빌딩 입구에서 눈에 익은 분위기의 한 할아버지가 걸어나오셨다. 운동복 잠바에 몸을 앞으로 구부리신 채.
첫 눈에 김원철 할아버지를 알아 볼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1918년 10월 29일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청년의 시절, 선생님은 선박관리 등의 사무 근무등 기관장까지 이른바 [바다꾼]으로 살아왔고, 1942년 결혼해 생활하다 홀어머님과 아내, 아들을 두고 남녘으로 내려왔다고 한다. 남녘에 내려와 곧바로 구속된 할아버지는 그 후로 27년 남녘의 교도소를 옮겨다니며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러던 78년 가을 어느날, 전주교도소에는 말로만 듣던 사상전향공작이 진행된다.
감옥생활을 하던 김원철 할아버지를 사상전향전담반은 사회견학을 시켜주면서 민주주의 나라에서 살고 싶지 않냐며 물어보는 온화(?)한 사상전향공작을 펴다 곧이어 폭력적 공작으로 전환한다.

매일 아침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는 것이 너무나 끔직하게 들려오던 그때.
사상전향 전담반은 소위 ‘통닭구이’(손과 발을 봉을 가운데 두고 묶어서 거꾸로 공중에 매다는 것)를 시켜 부딪히는 곳 어디라면 몽둥이 찜질을 해댔고 코에는 고춧가루 물을 부어 대는 등 철저히 동물적 행태를 해대었다.

수갑을 채워 의자에 온몸을 고정시켜 놓고 야구방망이로 쳐대던 그 전향전담반은 밤에도 자살하지 못하게 감시하고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0시까지 고문을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고문에 이기지 못해 기절하였던 할아버지는 정신이 들고 난 뒤 백지에 찍힌 지문을 확인하게 된다. 그 후 “조용히 살아가겠다”라는 말만 쓴다면 더 이상 고문을 하지 않겠다는 협박과 회유에 할아버지는 그들이 강요하는 대로 지문이 찍힌 종이 위에 그 글을 썼다. 그 종이는 김원철 할아버지의 사상전향서가 되었다.

그리고 몇 번의 계절이 바뀌고 1984년.
할아버지는 전주교도소에서 전향취소를 하는 글을 담당부서로 제출하였고 그 서류가 제출되자 말자 대구교도소로 이감된다. 함께 취소를 한 다른 장기수 할아버지와 떼어놓고 다시 격리시켜 교화시키기 위해서.
대구교도소로 이감된 할아버지는 격리된 사동에서 다른 장기수 선생님과 만나 보지도 못하고 혼자 옥고를 치르다 87년 8.15 사면조치로 출소했다.

언제나 배를 타고 싶었던 할아버지는 53년 휴전 후 전쟁으로 어업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철산 수산사업소로 가서 배도 만들고 교육도 할만큼 타고난 ‘바다 사나이’였다.

북녘의 생활에서 남녘의 생활로 이어지는 할아버지의 한 평생은 거친 역사의 풍랑을 보는 듯 했다.
남에 친지가 아무도 없어 출소한 직후 바로 사법보호소로 가게 되었고 지금까지 줄곧 그 곳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한다. 사법보호소에서 은행심부름이며 청소며 잡일을 도맡아 하고 심지어 운동 삼아 근처 약수터의 물까지 떠다 놓는다고 한다.

“아직은 건강하지만 어디서 일거리를 찾아 노동을 할 수 없어 사법보호소에서 잡일을 하고 있지요. 그래도 그것이라도 할 수 있어 심심하지 않지.” “이곳도 예전처럼 간섭하고 그러지 않아서 지낼 만 합니다.”라고 걱정하는 우리의 표정을 읽으신 듯 “일 없습니다.” “건강합니다”고 하셨다.

북녘에 가시면 뭘 하고 싶으시냐는 질문에 “내가 갈 수 있겠냐?”고 하시면서 고향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서 솓구쳐 오르는 듯 “면회소라도 설치되면…” 하셨다.

김원철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2차 출소 장기수 송환을 요구하는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면회소라도 설치되면…” 하시던 할아버지. 이젠 중년이 된 아들, 남녘으로 올 때 13살짜리였던 코흘리개를 볼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신념의 고향으로 가실 수 있는 날을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 이루어지길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분명 장기수 송환은 분단의 역사와 함께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2000년 민족사적 쾌거였던 6.15남북공동선언이 이제는 성큼성큼 내딛어 통일조국 실현으로 이어져야겠다. 그리고 하루빨리 연로한 장기수 할아버지이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분단의 고통을 온 몸으로 겪고 계시는 할아버지들 앞에 언제나 세상을 알아가기엔, 한민족을 알아가기엔 철부지인 나의 발걸음은 무겁게만 느껴졌다.

(이 글은, 2001년 대구경북양심수후원회 실무자가 김원철 할아버지를 만난 뒤 쓴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저작권자 © 평화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당신이 좋아할 만한 기사
지금 주목 받고 있어요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