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나에게 왔다"

평화뉴스
  • 입력 2006.12.11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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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에세이] 이은정...
“사랑스러운 내가 보이자 모든 이들이 아름답게 보였다”


“지금 몇시고?”
이불에 얼굴을 파묻은 채 먼저 일어나 놀고 있는 여섯 살박이 큰 놈에게 물었다. ‘음~ 8시 90분이야 엄마“. ”음..7시45분이군..“
그러자 킥! 웃음이 났다.
내가 여섯살 아이의 세게와 소통할 수 있다는게 행복했다.

사실 그동안 나는 ‘행복’이란 단어와 아주 멀리 있었다.
누가 “행북한 하루~”하고 인사하면 거부감으로 닭살부터 돋았으니까.

가슴 깊은 곳에는 세상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이 가득해서 늘 칼끝처럼 예민하게 굴었다. 지독한 자기혐오는 사람에 대한 냉소와 경계심을 낳는 법이어서 초긴장 상태로 초조한 나날을 보냈다.


머리 속이 가득 차서 여유가 없었다.
행복이니 재미니 자유니 그런 바람 같은 말들은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늘 나에게 뭔가를 요구하고 있으며 나는 그 요구를 거절해선 안되고 오직 열성으로 잘 해내야 했다.
때문에 가족이나 자식들 같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은 모든 공적 영역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강인하고 똑똑하고 정치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여성성을 버리고 가정을 내팽겨쳤다.
나약하고 몰사회적이고 집안에만 머무는 일은 곧 퇴보라 여겼다.

그랬다. 나는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늙으면 추해지고 추한 모습으로는 살고 싶지 않았기에 내 나이를 늘 스무살 언저리에 놓아두었다.
산다는 건 너무나 고욕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버틸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도 힘든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스스로 감내할 줄 아는 강한 사람이 되어야 했으므로.
징징대고 도와달라고 소리치는 건 바보 같은 짓이라고...

벼랑 끝까지 몰려 버티고 버티던 어느날 나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무지하게 외로웠고 서 있을 힘도 없었다. 말할 힘이 없어서 ‘힘들다’는 소리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지경까지 왔을 때에야 비로소 내 심연의 비밀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드디어 나는 비밀의 문을 열어 젖혔다.
많은 것들이 튀어 나왔다. 가장 깊은 곳에 ‘엄마’가 있었다.

세상에 모든 딸들이 그럴 것이다.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살지 않을거야! 하고.
나 역시 가슴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나는 절대로 기필코 반드시 꼭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엄마처럼 무기력하고 나약하게 학대받으며 비웃음을 사는 일은 죽음과도 같다고.

내 인생의 열쇠는 바로 엄마였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나약성, 의존성, 여성성을 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부정하고 억누르는 것은 나의 대부분을 부정하는 일이었기에 나를 부정하는 혼란과 혼돈의 시간 속을 아프게 헤매었던 것이다.

인생의 열쇠를 쥐고서야 비로소 지나온 삶의 세부들을 복잡한 퍼즐 풀듯이 완벽하게 짜맞추어냈다.
머리 속이 뻥! 뚫리는 희열을 느끼면서 사랑스러운 나를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내가 보이자 다른 이들이 모두 아름답게 보였다.

세상의 모든 것이 경이로웠다. 마치 세상에 처음 태어난 것 같았다.

이제 나는 가방 속에 잔뜩 쑤셔넣고 다니던 책들을 꺼내었다.
짜투리 시간이 생기면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둘러보는 여유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바람의 농도와 햇살의 채색을 천천히 음미했다.

행복이 나에게 가까이 와 있었다.
안타깝게 나를 지켜봐준 사람들 생각이 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귀한 우리 아이들이 내게 있어 너무 고마웠다.

블랙홀처럼 혼미하고 길고 깊은 터널 바깥쪽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다.
깃털처럼 가볍게 햇살 속으로 걸어나온 내가 대견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제 나는 세상에 없는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자유를 얻었다. 아이의 시간, 8시 90분.
행복한 시간여행, 즐거운 비명!


[주말 에세이 22]
이은정(대구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 월간 소식지 <지빠귀와 장수하늘소> 편집장)



(이 글은, 2006년 12월 1일 <평화뉴스> 주요 기사로 실린 내용입니다 - 평화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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